[프랑스] 왜 권력은 사회당을 약화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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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정성미(국제팀, ISC)

* 본 기사는 Le Monde의 “Pourquoi le pouvoir a toujours miné le Parti socialiste”를 번역한 글입니다.

급진적인 사회변화라는 이념을 내세워 승리했음에도, 일단 권력을 쥐게 되면 사회당은 현실에 순응하게 된다. 이것이 사회당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역사학자 마르크 라자르는 주장한다.

패배한 정당이냐, 집권 여당이냐? 사회당은 두 선택지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겪는 갈등 때문에 파괴될 수도 있다. 시앙스포의 역사학·정치사회학 교수이자 역사 연구소 소장이면서, 로마에 있는 뤼스[1]의 행정학회 회장이기도 한 마르크 라자르는 2013년 렌 대학 출판사에서 발행한 『통합 사회당, 역사와 후손(Le Parti socialiste unifié. Histoire et postérité)』의 공동 저자이다. 그는 사회당이 집권하여 권력을 행사하면서 마주했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최근 마뉘엘 발스[2]가 선언했듯, 사회당은 사망선고를 받았는가?
나는 좀 더 신중하게 보고 싶다. 사회당이 겪고 있는 위기는 심각하지만 사회당은 전에도 여러 번 그런 위기를 겪었다. 5공화국[3] 시기에 사회당이 권력을 쥐게 될 때마다 수반된 갈등은 사회당이 선거에서 실패하게 만들었다. 프랑수아 미테랑의 첫 번째 임기 때(1986년에서 총선에서의 패배), 두 번째 임기 때(1993년 총선에서의 완패),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리오넬 조스팽이 결선투표에도 오르지 못했을 때가 그랬다. 집권하여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 사회당은 커다란 어려움과 내부의 고통스러운 논쟁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사회당이 지닌 문제들이 프랑수아 올랑드의 임기동안 더 악화되었는가?
여러 가지 요소들이 문제를 크게 키웠다. 경제정책 및 사회정책과 관련한 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이 특히 그렇다. 프랑수아 올랑드가 부르제[4]에서 한 연설에 나온 유명한 문장, “여러분, 문제는 재정입니다.”는 친기업적인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과 크게 충돌한다.

EU와 관련한 문제도 사회당을 수 십 년간 분열시켰다. 프랑수아 올랑드는 긴축정책으로 돌아서기 위해 예산의 안정성을 위한 조약을 다시 협상할 것이라고 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고, 이러한 실패는 사회당 내부에서 이 주제에 관한 분열을 일으켰다. 사회당은 이미 2005년 유럽헌법조약에 관한 국민투표 문제로 이미 심각한 분열을 겪은 바 있다.

5공화국에서 대통령의 역할과 관련한 문제도 쉽지 않다. 의회 민주주의의 전통을 지닌 정당에게는 매우 까다로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마뉘엘 발스가 주장한 것처럼 대통령의 권력행사가 수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아니면 브누아 아몽이 제안했고 4공화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좀 더 수평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며 ‘정상적’ 대통령으로 있었던 올랑드는 사회당 내부에서의 논쟁만 격화시켰다.

끝으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국가의 취약점을 드러내면서 분열을 조장했다. 이 문제에는 두 개의 상반된 감수성이 존재한다. 하나는 테러리스트의 도전에 준엄하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국가의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가 이러한 테러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는지 이성적으로 성찰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왜 프랑스 사회당은 대체적으로 집권하면 고통스러운 결과를 거두는가?
우선 밝혀둘 것은 1905년 국제노동자동맹 프랑스 지부(SFIO)[5]의 창설 이래 프랑스 사회당이 겪은 모든 위기들이 집권으로 생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치의 대립 때문에 생긴 1920년의 공산당 분열, 1934년의 비시 프랑스에 기울었던 신사회주의자들로 인한 위기, 1930년대 말의 파시즘으로 인한 문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알제리 전쟁은 집권과 관련이 없다. 그러나 사회당이 집권했을 때 문제도 함께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창당된 이래로, 사회당은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목적, 즉 자본주의와 관계를 끊는 것과 집권하여 정책을 행사하는, 다른 말로 시장경제로 편입되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열했다.

두 연구자 알랭 베르구니우(Alain Bergounioux)와 제라르 그랭베르(Gérard Grunberg)는 이러한 갈등인, ‘권력이 지닌 오래된 고민’을 세밀하게 이론화하였다. 사회당은 프랑스의 다른 어떤 정당보다도 더 자주, 급진적인 사회변화라는 이념과 권력의 현실성 사이의 모순에 직면해왔다. 사회주의자들은 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다. 그러나 자본주의와의 단절이라는 이념은 그들 마음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 이상은 강력하면서도 급진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 1981년의 프랑수아 미테랑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사회주의자들에게 권력의 문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쾌락과 현실의 갈등이라 부른, 매우 고통스럽고 가차 없는 문제와의 대면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을 사회당의 오랜 역사 전체에서 발견한다. 1924년 좌파연합 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은 급진주의자들과 함께 당시의 정부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레옹 블룸[6]은 권력을 ‘쟁취’하는 것과 ‘행사’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합정부가 권력을 체계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앞으로 SFIO가 집권에 성공했을 때, 즉 선거에서 승리하여 압도적인 다수파가 되었을 때는 혁명적인 입장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갈등은 1936년 인민전선[7]이 승리했을 때 다시 나타났다. 사회당 내 우파는 너무 멀리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 좌파는 이 승리를 진보적인 사회정책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1947년에서 1951년까지의 냉전기간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 기간 동안 SFIO는 극단주의자라고 여겨지는 두 세력, 드골파와 공산주의자에 대항하여 MRP[7]의 기독교 민주당과 연합하였다. 연합으로 만들어진 중도적인 조직을 운영한 경험은 사회주의자들이 지속적인 불신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들이 보기에 중도적인 조직은 사회당이 집권하는데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근원적 갈등이 크게 문제가 된 마지막 시기는 5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사회당이 집권하게 된 1981년이다. 이 때 사회당은 국유화와 사회개혁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2년 후 ‘긴축정책으로의 전환’으로 멈추게 된다.

오늘날 프랑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혁명이 아닌 사회개량주의를 분명하게 내세우고 있다. 그들은 사회개량주의[8]를 처음에는 ‘부끄러운’ 것으로 보았지만, 나중에는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강한 개혁을 지지하는 당원들과 점진적 개혁을 지지하는 당원들 사이의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사회당의 좌파는 브누아 아몽의 정책이 정부 정책이 되기를 바랐는데, 급진적인 제안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프랑스 사회당, 더 나아가 유럽의 사회주의적 정당들 안에 아직 남아있는가?
반대세력이 되거나 집권세력이 되거나, 패배 정당이 되거나 집권 여당이 되어도 지속된 이 갈등은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이 갈등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위기, 노동계급의 우월한 역할, 혁명적 변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세기 후반, 초기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이론을 내세웠다. 모범적인 정당은 독일의 사회민주당(SPD)[9]이었고, 전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노동계급을 기반으로 하여 조직된 힘 있는 이 정당은 비록 권위주의적이고 비스마르크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독일에서는 집권하지 못했으나, 사회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90년대에 SPD 내에서 ‘수정주의 논쟁’이라 불리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0]과 칼 카우츠키[11]가 맞선 정치적, 이론적 논쟁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관한 마르크스의 몇몇 예언들이 맞지 않는다며, 혁명이라는 이상을 버리고 좀 더 사회개량주의적인 논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항하여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적 교리와 혁명을 옹호했다. 이 논쟁은 공식적으로는 카우츠키에게 우호적인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시기 이후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사회개량주의로 기울기 시작했다.

1917년, 마르크스주의와 유럽 사회민주주의 사이에 커다란 단절이 나타났다. 러시아에서 권력을 잡은 레닌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자를 자처하며, 사회민주당은 원칙을 버렸기 때문에 타락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대결은 좌파를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로 양분함으로써 20세기 좌파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920년, 프랑스에서는 SFIO는 당원 다수가 국제 공산당에 다시 가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레옹 블룸은 ‘누군가는 오래된 집을 지켜야 한다.’고 투르의 사회당 회의에서 말했다. 그러나 블룸 자신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까지는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그는 인간적 사회주의를 지지하였다. SPD는 1959년 바트 고데스베르크[12]의 회의에서 혁명이라는 교리와의 명확한 거리를 천명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상징적으로 단절하였다.

이러한 전환점으로 인해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을 잡았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와 상관없이 좌파의 마음속에 의미심장한 것으로 남아있다.

프랑스에서는 1946년부터 1969년까지 SFIO의 사무총장이었던 기 몰레[13]가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웠고, 미테랑 자신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사회적 맥락 안에서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위기와 같은 교리가 점진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오랫동안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사회적 현실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1990년대부터 시작된 ‘제3의 길’이라는 또 하나의 논쟁을 겪으면서 끝나게 된다.

‘제3의 길’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자이면서 철학자인 영국 출신의 앤서니 기든스에 의해 이론적으로 체계가 잡힌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조화를 이룬 정치적·경제적 철학을 수립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제3의 길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에 의해, 유럽에서는 1997년에서 2007년까지 영국의 수상이었던 토니 블레어에 의해 적용되었다. 그리고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의 총리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 사상은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는 변화하였고, 세계화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화는 불평등을 만들지만 커다란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화해해야 하며, 이제는 사회계층이 아닌 개인들이 중요하다.

1990년대에 토니 블레어는 교육과 직업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가장 취약한 사회계층을 지원하며 개인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취약 계층에는 서민계층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된 중산계층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유럽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하나의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아마도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의 논쟁보다 더 영향이 클 것이다.

또한 이 변화는 정치 판도에서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좌파와 우파의 대립은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사이의 대립 때문에 흐려졌다. 중도 좌파는 낙관주의를 품게 되었다. 국가의 역할은 작아졌다. 사회권과 함께 개인의 의무와 책임도 중요해졌다. 이러한 결과들은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흔들어 놓았다. 그들 중 다수는 그들이 제3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피네 당(프랑스 사회당)이라는 눈에 띄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왜 프랑스 사회당은 이러한 변화에 저항하는가?
왜냐하면 이러한 제3의 길이 자유주의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고, ‘사회자유주의’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프랑스 좌파 안에 침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집권했을 때, 프랑스 사회주의자들 역시 사회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전처럼 사회개량주의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역사적인 것이다. 1990년대 말에 제3의 길과 관련한 논쟁으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격분했을 때, 1997년에서 2002년까지 권력을 잡았던 조스팽 정부[14]는 프랑스 공산당과 녹색당 등 다수의 좌파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전술적으로 제3의 길로 나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화적인 이유도 있는데, 프랑스 좌파들은 제3의 길이 경제적 자유주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회당이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문화적인 자유주의를 받아들일 만큼 진보적이었다면, 경제적 자유주의도 편안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군주정치에서 물려받은 국가가 주도하는 문화를 중요시하는 분위기를 지닌 프랑스에서 사회당은 그러지 못했다.

끝으로, 제3의 길은 좌파와 우파의 분열로부터 벗어남을 가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정치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1789년의 입헌의회에서 여러 정당들이 자리 잡은 위치로 좌파와 우파가 정해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가 이 분열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좌파와 우파는 최고의 구분인데, 사고방식, 문화, 정치적 행동방식을 구조화한 역사학자 르네 레몽은 이것을 수마 디비지오(명확한 구분)[15]라고 불렀다.

좌파와 우파라는 구분은 5공화국 기간 동안 1차 투표와 결선 투표를 통해 과반을 얻게 하는 투표방식을 지닌 선거법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경제적인 문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좌파와 우파 사이의 대립은 점점 어려운 것이 되고 있지만, 선거 때가 되면 이 구분은 다시 명확해진다. 지난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이 이 구분을 어지럽히기는 했지만.

제3의 길을 받아들인 국가가 그 결과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오늘날 사회자유주의의 모든 지지자들이 그 결과를 알고 있다. 제3의 길은 기적의 해결책이 아니다. 확실히 제3의 길은 그것을 받아들인 대부분의 국가에서 실업률을 낮추었다. 그러나 2008년의 재정 위기 이래로 강화되어온 불평등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제3의 길에 해당하는 정책들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뿐만 아니라 더 이상은 그 정책들을 시행하는 정당들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예로 이탈리아에서 마테오 렌치[16]의 민주주의 운동(mouvement démocrate)은 다른 정파(Mouvement 5 Etoiles)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세계화는 우리를 역사적인 격변기에 몰아넣었고, 유럽의 좌파 전체가 위기에 처해있다. 이 문제는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당은 변화에 대한 저항이 크기 때문에, 지적인 작업과 이론적 작업이 부실할 때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사회당은 아마도 가까스로 생존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의 미래는? 사회당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새로운 사회당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된 1971년의 에피네 회의[17] 이후, 사회당이 지니게 된 강력한 힘은 하나의 정책에 관한 당내의 다양한 의견들을 통합해왔다.

그러나 그 힘은 이제 사라졌다. 프랑수아 올랑드의 임기 동안 마뉘엘 발스가 말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좌파들이 사회당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오늘날의 프랑스 좌파는 두 개의 극을 지닌 자기장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극은 멜랑숑이고, 다른 극은 마크롱이다. 반대되는 두 힘 사이에서 분열한 사회당은 그 중앙이 약화되고 있으며, 중앙에서 당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회당이 이 위기를 벗어날 것인가? 사회당이 계속 존재해야 한다면 당의 하부조직, 정체성, 전략 등 모든 것을 다시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회당은 1981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집권했을 때의 권력 행사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해야 한다. 올랑드의 5년 임기가 지나간 지금,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자기반성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자기반성을 거쳐 그들 중 일부가 ‘오래된 집을 지키게’ 될 것이다.

** 꺄뜨린 뱅상(Catherine Vincent)이 마르크 라자르(Marc Lazar)를 인터뷰하고 쓴 2017년 5월 19일자 르몽드 기사. 지난 대선에서 당시 집권당이었던 사회당 후보, 브누아 아몽은 1차 투표에서 지지율 5위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결선투표에도 진출하지 못하였다. 이 인터뷰 기사는 이러한 사회당 몰락의 원인을 다루고 있다.

  1. Libre université internationale des études sociales, 줄여서 뤼스(Luiss)라고 한다.
  2. Manuel Valls. 올랑드 정부의 총리를 역임하였다. 지난 대선에서 사회당 경선에 출마했으나, 브누아 아몽에게 패배하여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3. 프랑스는 1958년부터 현재까지 대통령의 권한이 크게 강화된 5공화국이다.
  4. Bourget. 파리 교외 북동쪽에 있는 꼬뮌
  5. 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ère. 줄여서 SFIO라고 한다. 프랑스 사회당의 옛 명칭이다. 1969년에 사회당으로 명칭을 바꿨다.
  6. Léon Blum. 레옹 블룸은 프랑스 사회당 소속의 정치가로 1919년 하원에 진출하여 사회당을 재건하고, 인민전선을 이끌어 1936년 프랑스 최초의 사회당 총리가 되었다.
  7. Front populaire. 1930년대 중후반 파시즘이나 극우세력에 맞서 좌파 조직들이 연합하여 만든 것이다.
  8. 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 대중 공화주의자 운동. 프랑스의 과거 정당 중 하나.
  9. réformisme. 혁명주의를 배격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점차적으로 사회 개량을 추구해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10.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줄여서 SPD라고 한다.
  11. Eduard Bernstein. 마르크스 교리에 비판을 가한 최초의 사회주의자.
  12. Karl Kautsky.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
  13. Bad Godesberg. 독일 북서부 노르트라인베트스팔렌 주에 있는 본의 남부 행정구
  14. Guy Mollet. 프랑스의 총리를 지낸 사회주의 정치가.
  15. 당시 대통령은 시라크였지만 1997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하여 조스팽이 총리가 되었다. 조스팽은 취임 이후 주당 노동시간을 35시간으로 단축하고 실업률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폈다.
  16. summa divisio. 라틴어 표현이다. 영어로는 The principal division.
  17. text-for-third-footnoteMatteo Renzi. 2014년 이탈리아 총리가 되었으나, 2016년 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에서 추진한 개헌안이 부결되자 총리직에서 사임하였다.
  18. congrès d’Epinay. 1971년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Epinay-sur-Seine에서 열린 사회당 회의. 미테랑을 제1서기로 선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