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사이클이 끝난 것인가, 아니면 혁명의 과정인가?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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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알바로 가르시아 리네라(볼리비아 부통령)
번역 : 심태은(The 숲 한글판 편집장, ISC)

* 본 기사는 더 던 뉴스(The Dawn News)의 “The end of the Progressive Cycle? Or a process that goes through Revolutionary Waves? Part 2 & 3 (http://bit.ly/2vHPRf7 & http://bit.ly/2wgIv5P)”를 번역한 글입니다.

본 기사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요약본이다. 1부는 이곳에서, 스페인어 원문으로 된 글 전체는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글 번역본 1부는 이곳에서)

과거 10년의 취약점과 5대 긴급 과제

라틴아메리카의 일부 주요국은 보수의 낡은 이상으로 후퇴했으며, 다른 국가들의 경우 기사회생한 우파가 권력을 앗아갈 수 있는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에 지난 10년 간의 성과에서 나타나고 현재의 상황을 만들어 냈으며, 반동세력이 현재 정치권력 재탈취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 5가지의 한계점 또는 모순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한계는 그저 논리적 흐름에 따라 기술되었을 뿐, 중요도에 따른 나열은 아님을 미리 밝힌다.

  1. 성장과 경제 안정 : 사법과 정치권력의 물질적 토대

민중 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 경제라는 물질적 힘이 가지는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혁명기에는 국가가 생산자이자 전 국가적 생산물의 관리자이며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혁명 과정에서 이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사회불안이 가중되고 진보적이며 혁명적 정부에 대한 지지가 감소하며, 사회 계급 내에 존재하는 보수정치세력의 선동이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현재 진보적이며 혁명적 정부가 가진 취약점 중 하나는 바로 경제 관리이다. 서민들의 경제적 조건과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혁명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밀물과 썰물이 있는 파도와도 같아서, 집단적 행동 내 보편성이 극대화되는 순간이 있으면, 조합주의가 도래하는 시기, 일상이 해체되는 순간도 있다.

그 어떠한 종류의 경제 혁명 정책도 민중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정의, 재분배, 민중에 관한 장∙단기적인 목표가 정부 행위의 나침반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성장’만을 우선시한다면, 혁명 과정이 스스로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정의나 재분배가 없는 성장에서 많은 이득을 얻은 사람들이 결국 이러한 성장을 더욱 손쉽고 빠르게 달성할 수 있는 정부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혁명적 정치세력은 국가와 자신이 대변하는 사회 세력으로부터 나오는 경제권력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 손에는 노동자를 위한 정치적 권력을, 다른 손에는 기업가를 위한 경제적 권력을 쥐는 이중성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2. 영구적인 문화혁명

혁명의 승리를 결정지었던 위대한 투쟁, 행진, 항쟁에 앞서, 사회 혁명 세력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이었던 요소는 시대가 요구하는 상식을 추구하는 사상 영역에서의 승리였다.

정부 운영 과정에서 우리는 때때로 야당 세력에 대항한 정치적 행동, 행정적 관리, 또는 그 과정에서의 경제적 성과 추구를 우선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 투쟁, 사회의 의식화[1], 우리가 건설하려는 세상의 이론적, 도덕적 중요성에 대한 선전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올바른 방향에서 정치, 행정, 심지어는 경제의 관리가 진행된다고 해도 결국 정부를 스스로 약화시키고, 민중 부문과 멀어지게 만들며, 민중의 의식 속에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세계에 대한 설명이 점점 자리를 잡게 만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정부가 겪었던 여러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회의 의식화 없이 부의 재분배를 실시한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위 계급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이와 함께 형성된 일반대중의 의식 속에는 정치적 의미, 혁명적 정치의 승리, 투쟁을 통해 쟁취한 권리의 상징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중요한 전장(戰場)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부에서 이미 추진중인 혁명 과정에서 이념/상징 투쟁을 정치투쟁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공권력이나 공무원이 아니라 지역사회, 대학교, 또는 풀뿌리 사회의 지도자가 되거나 라디오나 TV 쇼 진행자, 사회운동 조직운동가가 되어야 한다. 사회 기층, 지역사회, 공장, 라디오 및 TV 방송국 등에서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적 재현은 일반대중의 의식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을 하지 않아도) 능력이 출중한 장관이나 의회를 가질 수도 있지만, 그 대신 엄청난 문화적 후퇴(대중의식의 후퇴)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혁명 과정에서 임무 분담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민감한 주제이다.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민중 세력의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가진 에너지와 자원, 그리고 최고의 정치 지도자를 정부 운영에만 투입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사회에서 만들어진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힘 덕분에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 국가 권력의 통제를 보장하는 방법이 사회로부터의, 그리고 (언론, 노동자 및 농민 조합, 지역사회, 문화에서의) 사회 자체적인 힘의 건설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점을 망각하게 될 것이다. 혁명적 또는 진보적 과정이 정부의 관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혁명의 생명력이 살아 있는 기층조직의 훌륭한 혁명적 학생, 조합, 지역사회 지도자 또한 훌륭한 장관이나 의회만큼 중요하다.

3. 도덕적 개혁과 청렴성

진보적이고 혁명적 정부가 가진 세 번째 취약점은 도덕적 개혁에서의 부진함이다. 부정부패는 언제나 사회를 좀먹는 암적인 존재이다.

신자유주의는 부정부패의 제도화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두 세대에 걸쳐 공공자원을 독점하고, 사유화했기 때문이다. 사유화는 부정부패가 얼마나 일반화되었는지를 가장 수치스럽고, 부도덕하고, 품위 없으며 천박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진보적이며 혁명적 정부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때로는 그 강도가 높기도 했지만, 국유화를 통해 사유화된 자원들을 사회 공공 자원으로 환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공공 자원을 모두의 소유로 되돌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공공영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개개인이 겸손함, 검소함, 소박함, 투명성, 청렴성을 일상과 자신의 존재 방식에서 잊지 않는 것이다.

현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사회악, 특히 부정부패를 극복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일반적 의지가 바로 혁명이다. 그렇기에 모든 지도자와 대표자는 구체제에서 국고를 유용하며 자신의 배를 불렸던 이들과는 현격하게 다른 모습을 일상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몸, 행동, 그리고 일상에서 우리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필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우리는 생각과 행동, 존재와 말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

우파 언론의 위선적 도덕관에 맞서, 투명하게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통해 민중에 의한 국가관리의 고귀함이라는 혁명적 도덕성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4. 역사적 리더십의 지속

혁명 과정을 복잡하게 만드는 네 번째 요소는 혁명 정권의 리더십을 민주적으로 지속하는 것이다.

리더십 지속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시대정신을 개인으로 구체화하지 않는 진정한 혁명이라는 것이 있던가? 혁명이 제도와 이에 따른 세속적 규칙과 절차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이 아니다. 혁명가는 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 주체성, 사회 계급, 개인을 통해, 또 억압적인 일부 제도와 특권 계급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혁명은 기존의 규칙과 틀을 극복하고 뼈와 살을 가진 주체의 가치를 역사적 창조성이라는 공간에서 찾아낸,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내는 집단적 사건인 것이다.

민중의 주체성과 인간의 힘이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혁명 과정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민중의 신념을 재구성하는 혁명이라는 강력한 역사적 사건은 이를 위한 집단적 노동을 잘 보여주는 (지도자의) 성격과 말로써 개개인에게 구체화된다.

이러한 역사적 지도자는 사회생활의 최대 공로자로서 집단적 행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상징하고 결속하는 일종의 아바타이다. 그렇다면, 헌법이 지도자나 개인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것을 감안할 때, 혁명 과정은 어떻게 지속성을 가질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정부 임명직과 선출직을 오가며 정치적 후퇴를 불러오는 강력한 지도자를 가지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는 지도자나 학자의 손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상황을 감안하면, 하위 계급이 어떻게 투쟁 경험을 내재화하고, 그들의 혁명적 행동의 성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따라 (강력한 지도자를 가질 것인가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사전에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집단적 현실의 객관적 사실이다.

혁명의 지속성을 위해, 민주적 질서 하에서 선거 승리라는 더 큰 가능성을 담보하는 집단적 리더십을 추진하고 추구하는 것에 중요성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조차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정치토론을 통해서 해결되어야만 하는 문제이다. 혁명적 리더십이 역사적 지속성을 유지하면서 리더십을 제한하지 않는 주체적 지속성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5. 다민족 대륙 국가

우리가 자기비판적이지만 긍정적 방식으로 짚어봐야 할 마지막 약점은 대륙 차원의 경제 통합이 미진하다는 점이다. 지난 10년 간, 라틴아메리카는 정치적 접합[2]에서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 볼리비아 국민은 민주주의적 지속성이라는 정치적 문제에 직면했을 때, 연대의식을 보여준 아르헨티나, 브라질,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쿠바에 처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대륙적 차원의 연대는 쿠데타 시도를 억제하고 민주적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 통합에서는 실질적 진전이 없었다. 수크레[3] 도입, 라틴아메리카 내 다국적 기업 설립 및 국영 기업의 접합을 통해 타 시장에서 공동 영향력을 갖추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결국은 뒷전으로 밀렸다.

경제 통합을 완수하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상은 다른 시장, 경제, 지리적 공간을 실현하는 것인데, 각 정부는 자국의 지리적 공간, 경제, 시장에 따른 비전을 맥락화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각 사회의 사고방식이 가진 한계가 제기된다.

제안은 있지만, 구매, (재정의) 균형, 투자와 기술 등을 검토하다 보면 속도가 느려지고, 각국 공무원들은 자국의 기준과 이해, 즉각적 유익성 등을 따른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들은 국가적 계획에서 벗어나 대륙적 기조를 생각해야 한다. 또한, 세계는 변화하고 있으며, 일부 2~3개국으로 이루어진 대륙을 제외하고는 모든 국가가 전 세계의 상호의존성이라는 변화 방향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이를 바꿀 힘도 없다.

국가적 구조를 존중하고, 동시에 각 국가의 지역적/문화적 구조를 존중하면서 경제 세계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방향 재설정을 할 수 있는 대륙차원의 기관을 금융, 사법, 문화, 정치, 상업 부문에서 설립하고, 다민족 대륙국가로써 라틴아메리카가 스스로를 구성할 수 있다면, 라틴아메리카는 21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대륙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는 4억 5천만명 이상이 살고 있으며, 인구 구성이나 시장 측면에서 볼 때, 전 세계에서 결정적이고 유의미한 요소로 작용한다. 여기에, 우리가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은 라틴아메리카가 리튬, 가스, 석유 등의 전략적 광물, 담수, (금세기 들어 최고의 가치를 가진 보물인) 생물다양성 등의 최대 보고이고, 전 세계에서 최대 경작면적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는 전문 교육을 받은 청년 인구가 많은데, 이들이 기술 개발과 지식 창출 부문에 진입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정치적, 경제적 단일성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전 세계의 시공간과 경제 세계화의 방향을 바꾸어 라틴아메리카에 이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탈 신자유주의: 이 시대에 극복할 수 없는 한계

혁명적 민중에게 지금 시기는 혹독하면서도 흥미로우며, 어려운 시기이다. 우파 반동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탈환하고자 하고 있고, 일부 국가에서는 우리의 약점을 이용해 그러한 목표를 달성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우리는 어디쯤에 있는가? 우리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우리는 다가올 전투를 앞두고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비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1848년에 혁명 과정을 분석하면서, 혁명은 결코 지속적이거나 (혁명을 위한) 공세가 영구적으로 계속되는 것이 아닌, 파도와 같은 과정이라고 항상 설명했다.

과거와 실제 현실에서 보면, 하위계급은 역사적 주도권을 파도, 즉 일시성을 통해 조직해 왔다. 일정 기간의 상승기를 거치고, 일시 후퇴했다가 다시금 위대한 역사적 주도권을 쟁취한다. 역사의 경로와 집단적 요구가 사회적 불만과 창의성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 통로를 계속 찾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경험했던 지난 10년과 같은 사회적 범람의 첫 번째 파도에 뒤이어 일시적인 썰물이 따라오게 된다. 그러나 곧 두 번째 파도가 다가올 것이며, 이 파도는 이전보다 더 멀리, 깊이 퍼져나가 사회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고, 이보다 더 나은 세 번째 파도 또한 밀려올 것이다.

감히 고하건대, 우리는 현재 첫 번째 파도의 끝자락에 와 있고, 수 개월 또는 수 년간 지속될 후퇴에 직면하고 있다. 얼마가 될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현재의 혁명이 그 가능성을 아직 상실하지 않고, 혁명을 촉발했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분명히 두 번째 파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파도는 첫 번째 파도를 일으킨 원인이자, 아직 달성하지 못한 역사적 이해와 요구를 해결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의 일시적 후퇴라는 전투를 대비해 준비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 첫 번째 파도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실패했는지,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으며, 이러한 약점을 즉시 시정하고 해결이 미흡했던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논의해야 한다. 그리하면 두 번째 파도가 다가왔을 때, 이전보다 더 멀리, 더 나은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비판과 자기비판도 혁명적이어야 한다. 즉, 단순히 비방을 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신념을 가지고 스스로가 쌓아왔던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책임을 외면하는 것은 혁명 과정의 수행을 발코니에서 지켜보았지만, 지금은 같은 발코니(대신 재정지원을 받은)에서 무기력하게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해야 했는지를 읊조리는 무능력한 좌파나 하는 짓이다.

이러한 것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기 비판은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행동을 위한 것이다. 후퇴기에는 실질적인 저항, 재조직, 대중 부문의 새로운 이니셔티브 탐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두 번째 혁명의 파도는 더 멀리 뻗어나갈 것이다. 쿠바,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와 같이 절대 굴복하지 않는 거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가 라틴아메리카의 나머지 대륙과 영토 경계를 넘어서는 곳까지 혁명을 전파할 것이다.

지금 시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혁명가에게 있어 어려운 시기라는 것은 상수이다. 우리는 항상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우리야말로 (계급의) 제일 밑바닥 출신 아닌가?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가장 고통을 겪고 배제되었던 사람들 아닌가?

라틴아메리카의 황금기는 결코 선물이 아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 조합, 대학, 동네, 원주민 사회로부터의 투쟁이 이 혁명적 사이클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 파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몸에는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거쳐오면서 겪은 상처와 흉터가 남아 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싸움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자. 혁명이 살기 위해서는 경험을 취하고, 전에 이루었던 것을 다시 시행하고, 미래에 건설할 사회의 상을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

싸우고, 승리하고, 쓰러지고, 패하고, 다시 일어서고… 싸우고, 승리하고, 쓰러지고, 패하고, 다시 일어서고… 이것이 생이 다할 때까지 겪게 될 우리의 운명이다.

그러나 역사적 시간의 흐름은 우리 편이다. 반동 세력은 에미르 사데르(Emir Sader, 브라질 상 파울루 대학 사회학과 교수)가 말했듯, 그 어떠한 대안도 없으며, 혁명적이고 진보적 혁명 과정에서 수행된 여러 개선 과제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파는 그저 과거의 실수, 원한, 질투에만 휩싸여 있을 뿐이다. 이들은 실패하고 쇠퇴한 신자유주의를 회복시키려 한다. 우리는 우파가 라틴아메리카를 통치했을 때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에콰도르에서) 무엇을 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 이들은 우리 국가를 파괴하고, 비참하고 의존적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집단적인 수치심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기사회생한 우파, 사망한 신자유주의는 미래를 대변하지 못한다. 이들은 그저 좀비처럼 돌아다니면서 역사의 곳곳에 무의미한 주먹질을 할 뿐이다.

탈 신자유주의가 미래이자 희망이다. 지난 10년 간 진보적이고 혁명적 정부가 더 많은 사회적 권리를 부여하고 국가의 주권을 세우는 것을 통해 이루어낸 것은 지난 세기 이루어낸 것보다 더 큰 것이다. 반대로 우파로의 회귀는 과거이다. 그리고 역사적 시간의 흐름은 혁명의 편에 서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매우 신중해야 하고, 모든 것이 혁명 세력에 부정적이었던 80년대와 90년대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싸움에 내던지고 그 결과 패한다면, 이 힘은 오히려 적을 강화하고 우리를 약화시킨다는 점, 싸워야 할 때에는 이에 대한 계산을 잘 해야 한다는 점, 정당성을 획득하고 이를 민중에게 설명하는 법, 우리가 직면하는 매번의 새로운 싸움에서 민중의 희망과 지지, 혁명 감수성과 감정을 확보하는 법, 대중매체와 신문, 소형 팜플렛, 대학, 학교, 조합 등에서 크고 작은 사상전에 다시금 돌입해야 한다는 점, 희망과 탈신자유주의, 사상, 조직 및 동원이라는 새로운 상식을 다시금 만들어야 한다는 점 등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싸움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지만, 1년, 2년, 3년, 4년 혹은 그 이상 지속될 것에 대비해야만 한다. 우리가 구덩이에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시기를 보내고 되돌아보니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우파가 그 당시 변화의 화신이라고 스스로를 칭했다면, 이제는 과거를 상징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제는 좌파가 변화의 전령이다.

정부 행정에 관해서든, 야당에서든 간에 싸움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시기가 좋다는 것을 말한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현재 변화하는 중이며,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민중을 위한 이 위대한 대륙적 차원의 민주주의, 정의, 평등의 기치가 8~10개국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20개, 30개 혹은 그 이상의 국가들이 함께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1. 전 사회 구성원이 정치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
  2. Articulation. 사회체계의 부분들을 함께 결합시킨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사회통합의 개념과 유사함.
  3. Sucre. 라틴아메리카 내 무역결재 수단(지역 단일결제시스템). 참고: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13&aid=000199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