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그리고 평화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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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메도필로 메디나 교수(콜롬비아 국립대학)
인터뷰 진행: 송대한(영문 편집장, ISC)
편집: 릴리안 헥스터 (교열팀, ISC)
번역: 지민경, 예선희(번역팀, ISC)
황정은(사무국장, ISC)

지난 3월 "우리 모두가 베네수엘라다"라는 연대 행사에 참석차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 온라인 간행물인 razonpublica.com의 칼럼니스트이자 국립 콜롬비아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메도필로 메디나(Medófilo Medina)를 만나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미국과 가장 가까운 군사, 정치 동맹국으로서 콜롬비아의 역할, 그리고 농민의 토지 투쟁 과정에서 탄생한 무장 게릴라 부대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 정부 간의 60년 군사 갈등을 종식시킬  역사적인 평화협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메디나 교수와의 면담 한 달 후인 4월 10일에 추가 인터뷰를 통해 흔히 콜롬비아의 테러리스트와 마약 밀매조직으로 그려지는 FARC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평화는 콜롬비아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인터뷰 자체가 콜롬비아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인터뷰 시기가 콜롬비아 대선 전이었기 때문에 콜롬비아 대선 결과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5월 27일에 치러진 콜롬비아 대선에서는 우파 후보인 민주중도당(Grand Alliance for Colombia)의 이반 두케(Ivan Duque)가 39%를, 진보 후보인 인간적인 콜롬비아당(List of Decency)의 구스타보 페트로(Gustavo Petro)가 25%를 득표했다. 과반 득표자가 없어 6월 17일 결선투표가 치러졌다. 결선투표에서 두케가 54%를, 페트로가 42%를 득표하면서 두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메디나 교수가 최근 기사에서 언급했듯, 이번 대선의 긍정적인 점은 페트로 후보가 패배했지만 많은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로써 콜롬비아 좌파에게 더 큰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두케 정부는 (아래 인터뷰에서 설명할) 정치적 자유 확대에 매우 중요한 조건인 평화협정 과정을 공격하며 이러한 기회의 장을 위협하고 있다. 두케 정부의 공격은FARC가 3차이자 마지막 무장 해제 과정을 완료했음에도 계속되고 있다.

콜롬비아는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가깝고, 지리적으로는 베네수엘라와 가깝다는 이유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일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콜롬비아가 이런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콜롬비아는 파나마 운하를 통해 대서양과 태평양에 접근할 수 있는 카리브 해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군사 전략상 요충지이다. 과거21세기 초에는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볼리비아, 우루과이, 그리고 어느 정도는 칠레에서 진보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콜롬비아의 정치는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현재 상황뿐만 아니라 19세기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의 콜롬비아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콜롬비아의 정치가 매우 고립되고 보수에 기울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년 이상 자유주의와 보수 정당이 정치를 장악했고, 서로 번갈아 집권하며 권력 나눠먹기를 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서로 공약을 논의하기도 했다. 따라서 콜롬비아의 과두제는 사회를 퇴행시키기 위한 군사독재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20세기,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게릴라와 국가 사이의 대결로 알려진 국내 분쟁은 정부가 사회 운동 진영을 더 탄압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부의 재분배에 대한 관심도 없고 참여민주제도 없던 콜롬비아 정부는 1990년대 초부터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이 현재 상황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배경이다.

가장 강력한 게릴라 군대인 FARC와 2016년 12월에 협정을 체결한 이후 시작된 “탈분쟁” 기간 동안 많은 모순과 변동이 있었다. 콜롬비아의 부르주아는 평화협정에 서명은 했으나, 협정 이행 의지를 충분히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평화협정이 효과적으로 FARC게릴라를 해산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평화협정이라는 분쟁의 해결책이 풀뿌리 세력과 정치적 대안을 위해 더 좋은 여건을 만들 것이라는 것이 내 희망이다.

FARC가 무장 투쟁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FARC는 사회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결국 FARC가 무기를 내려놓게 된 이유는?

FARC는 1964년에 결성되었다. FARC 결성 전인 1946년부터 1964년까지 우리가 “라 비올렌시아(La Violencia)”라고 부르는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세력 간의 충돌로 인한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 기간, 지주들은 당시 상황을 이용해 농민이 이전에 투쟁으로 획득했던 토지 소유권을 되찾고자 했다. 이 때문에 FARC의 투쟁은 농업적인 배경을 가진다. 땅을 되찾기 위해 지주가 소작농을 살해하기 시작했고, 농민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1964년, 이렇게 모인 농민들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FARC는 콜롬비아 여러 지역, 특히 토지소유권을 두고 충돌이 가장 심한 지역에서 활동했다. 이렇듯 토지는 FARC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FARC은 점차 세력을 확대했다. 1980년대와 90년대, 부르주아 계급은 FARC를 막강한 군대이자 정치적 위협으로 보았다. 그 결과, 콜롬비아는 평화협정 과정을 통해 결과물을 이끌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2010년에서 2016년까지 진행된 평화 협상에서 마침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 중 여러 차례의 대화와 협상이 아바나에서 진행되었다. 이 협정은 2016년 11월 보고타의 콜론극장에서 체결되었다.

FARC가 왜 평화협상에 참여했는지는 1990년대 말을 되짚어 보아야 한다. 1999년, 콜롬비아 계획(Plan Colombia)에 따라 미국은 콜롬비아 군의 FARC 공격에 해군 및 공군 병력을 적극 지원했다. 게다가 알바로 우리베가 대통령이 되고 많은 정부 예산을 전쟁에 쏟아 부었다. 우리베 대통령은 민주주의 수호를 촉구하며 농민군을 훈련시켰다. FARC는 군 지형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2010년에 반군은 시기적으로 봤을 때 기존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무장투쟁이 집권을 향한 길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반군 지도자 중 한명인 카타툼보(Catatumbo)가 말했던 것처럼, 그들이 더 이상 저항하고 생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장투쟁으로 근본적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평화협정 과정이 2012년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FARC는 군대해산에 관하여 단호한 결의를 보였다. 그 후 수년간 그들은 해산을 위한 협상조건을 논의했다.   

현재 FARC는 어떠한 전략으로 집권하려 하는가? 선거를 통해서 인가?

그러한 질문은 현 상황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 현재 FARC는정치적으로 운신의 폭이 매우 좁다. 평화협정 결과로 FARC는 선거에서 득표수와 상관없이 상원 5석, 하원 5석을 보장받았다. 2018년 3월에 총선이 치러졌고, FARC의 득표율은 매우 낮았다. 이를 보면 현재 정치적인 대안을 추구하는 세력이 FARC(FARC라는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되 인민을 위한 대안적인 혁명 세력(Alternative Revolutionary Force for the Common People)이라고 뜻이 달라짐)를 중심으로 결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새롭고 과감한 대안을 만들어내는 대신 이전의 이름을 고수한 것이 패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의 정치 지형은 FARC에게 그리 유리하지 않다.

대선 후보군을 보면 적어도 두 세 명은 우파, 두 명은 중도, 한 명은 좌파에서 나오는 등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우파 후보에는 현재 산토스 대통령 정권에서 부통령 및 여러 장관직을 역임했던 바르가스 예라스(Vargas Lleras)와 우리베의 정당인 민주중도당에서 출마한 이반 두케가 있다. 이 두 후보가 속한 당은 평화협정에 비판적이다. 중도 진영 후보에는 평화 협상에서 정부를 대표했던 세르히오 파하르도(Sergio Fajardo)와 움베르토 데 라 까예(Humberto de la Calle)가 있다. 대안적이고 진보적인 세력에서는 전 M19 게릴라 대원이자 1991년에 무기를 버리고 정치계에 입문한 구스타보 페트로가 있다. 페트로는 전 보고타 시장으로 사회개혁 정책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상황이다.

콜롬비아에서 좌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FARC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앞서 말했듯이, 정당으로서 FARC는 정치 권력이 그리 많지 않다. 오늘날 FARC는 풀뿌리 정치 운동으로써의 좌파를 대변하지 않는다. 연합좌파인 대안민주주의극점(Alternative Democratic Pole과 같은 정당들이 있고, 녹색당도 있다. 현재 상황에서는 구스타보 페트로가 진보를 대변하고 있으며, 이반 두케 후보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5월 말에 1차 투표가 진행될 예정이다. 그 때 결선투표 진출 후보가 결정될 것이다. 가장 암울한 상황은 두 명의 우파 후보가 결선에 진출하는 것이다.

2016년에 치러진 평화협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53%가 반대했다. 당신은 한 기사에서 62.5%가 국민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현재 콜롬비아 국민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정부와 게릴라 세력(민족해방군(ELN) 포함) 간의 국내 분쟁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과두세력은 평화와 희망을 가져오고 좌파를 위한 기회를 만들기보다 이러한 갈등을 공포 전술에 이용했고, 미국도 게릴라 세력이 마약 밀수범이라고 비난하는 데에 이를 이용했다. 그리고 이는 많은 혼란을 야기했다. 나는 국내의 군사적 갈등 극복으로 콜롬비아 대안 세력의 정치 조직에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리고, 사회적 동원에도 더 나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