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번역] 전쟁이 끝난 다음날 그대를 내 품 안에

이 글은 트라이컨티넨탈의 “I Will Hold You in My Arms a Day After the War: The Fifth Newsletter (2020)”을 전문번역한 글입니다.

2020년 1월 30일

산투 모포켕,아이즈 와이드 셧, 모투렝 동굴, Clarens – Free State (2004)

산투 모포켕,아이즈 와이드 셧, 모투렝 동굴, Clarens – Free State (2004)

1월 27일 월요일 남아공의 사진작가 산투 모포켕이 별세했다. 오랜 세월 카메라를 들고 반(反) 아파르트헤이트 투쟁 현장을 누볐던 그였지만, 수년간 경찰의 폭력과 민중의 저항을 사진에 담아오며 ‘음울함, 단조로움, 고통, 투쟁 및 압제를 보여주는 사진’을 찍는 것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고 1993년에 고백했다. 그 때부터 산투는 흑인 노동계급의 삶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그는 “어쩌면 나는 사진으로 남기를 거부하는 것을 찾으며 그림자만 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미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은 그림자를 쫓는 것이다. 

미래가 암울할 때 우리는 눈을 질끈 감고 싶어진다.

유엔 무역개발총회(UN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는 1월 중순에 세계 경제 현황과 전망 2020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의 요지는 금년 세계 경제 성장률이 저조할 것이며 열강들은 금리를 인하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주류 경제학자와 금융업자 간에는 자본의 유입이 투자로 이어지며, 경제 성장률을 증가시킬 것이라는 근본주의적인 믿음이 존재한다. 그러나 UNCTAD의 보고서에서도 볼 수 있듯, 이는 환상에 불과하다. 시장에 공급된 유동성은 제조업, 서비스업이나 복지에 투입되는 대신 금융 시장으로 유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UNCTAD 보고서는 ‘과중한 통화정책은 투자를 촉진하는 데 불충분하다. 다수의 국가에서 투자가 억제되는 것은 자본 조달비용 때문이라기보다는 불확실성과 기업 신뢰도 부족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막대한 양의 세계 부채가 ‘생산역량 향상이 아닌 금융 자산으로 유입되고 있으며, 이는 금융시장과 실제 경제활동 간의 심각한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본이 제조업에 투자된다 하더라도 고용을 증가시키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오히려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자본이 마이너스 금리 국채로 유입되는 것은 자본시장이 미래 경제성장을 비관적으로 전망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트라이컨티넨탈이 1월에 발표한 Dossier 24, 위기와 저항 사이를 오가는 세계에서 지적했듯이 현 체제가 보내는 심각한 고통의 신호이다. 

각국 중앙은행은 저조한 경제성장에 대한 해법으로 금리 인하를 추진했다.  미연방준비은행(연준)은 최종대부자로서 금리를 다시 한번 인하했다. 현재 1.5%에서 1.75% 사이를 오가는 금리 수준은 연준이 향후 금융위기나 더욱 심각한 경제 성장 둔화가 닥쳤을 때 더 이상 인하할 여지가 거의 없는 수준이다. UNCTAD 소속 경제학자들은 ‘통화정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경제 성장률을 충분히 회복시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금융 안정성 리스크 악화를 비롯해 상당한 비용을 수반한다’고 분석했다. 금리가 낮을 시에는 위험이 저평가된 상황에서도 대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금융시장에서 신중하지 못한 투자 활동이 성행하게 되며 자산이 고평가 되고, 세계적으로 부채가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알리 이맘, 농부들 (1950년대)

알리 이맘, 농부들 (1950년대)

신자유주의 질서의 등장 후 각국 정부는 경제 개입 시 금리 조정 등의 통화정책만을 사용할 것을 요구 받았다. 국가 예산을 통한 공공지출용 자금 조달 등의 재정 정책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 대신 감세와 긴축이 권장되고 있다. 그러나 민간 자본이 사회에 필요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실질적인 공공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해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공공투자는 (UNCTAD의 말을 빌리자면) ‘에너지, 농업 및 운송 부문의 탈탄소화를 위한 정책 조정, 친환경 재생 에너지, 청정 수원 및 운송 수단 연계에 대한 접근성 확대를 목적으로 하는 인프라에 선별 투자, 수준 높은 교육, 보건의료 및 정규 고용에 대한 기회의 평등 보장’ 등을 동반한다.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 경제 포럼에 참가한 피로에 찌든 의사결정권자들은 이러한 공공투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기후변화가 완전히 새로운 문제인 양, 그리고 수십억 명의 삶을 위협하는 금융 불안정성과 말라붙은 자본 투자와 완전히 무관한 문제인 듯 논의했다. 매년 옥스팜(Oxfam)은 다보스경제포럼 참석자를 위하여 세계의 불평등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한다. 금년 보고서는 현재 2,153명의 억만장자가 세계 인구의 60%인 46억 명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더불어 보고서에는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여러 번 읽을 수 밖에 없는 통계 수치가 다수 포함되었다.

  •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2명의 남성은 아프리카의 모든 여성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 세계 상위 1%의 부유층은 69억 명이 보유한 자산의 두 배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 약 5,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가 건설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10,000 달러씩 저축을 하더라도, 그 금액은 현재 5대 억만장자가 평균적으로 소유한 자산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 전 세계 여성과 여아는 매일 총 125억 시간의 무상 돌봄노동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러한 무상 노동이 세계 경제에 기여하는 규모는 매년 10조 8,000억 달러에 달하며, 세계 하이테크 산업의 3배 규모이다.

인지 아플라툰, 수감자들(1957)

인지 아플라툰, 수감자들(1957)

이러한 불평등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다보스에서 벌어진 논의들이 무미건조하고, 심지어는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을 것이다. 다보스포럼에서는 2명의 경제학자가 미-중 무역분쟁의 완화와 소비자 지출 증가를 근거로 현 경제에 긍정적인 신호가 보인다고 주장했다. 불평등이나 소비자 지출이 저금리 신용 차입과 막대한 부채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들은 “라틴아메리카의 폭동과 인도의 경제성장 둔화와 같은 국지적 문제 또한 우려의 여지가 있다”는 괴이한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실바노 로라, 베트남(1971)

실바노 로라, 베트남(1971)

지금 라틴아메리카의 폭동이라고 했는가? 라틴아메리카가 겪고 있는 사회 불안의 핵심은 (볼리비아 쿠데타, 실패로 끝난 베네수엘라 쿠데타 등) 다양한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 공작, 그리고 시위에 대한 정부의 탄압(칠레, 에콰도르)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나타나는 폭력은 제국주의와 현지 기득권층이 라틴아메리카에 강요한 것이며, 이를 폭동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마치 이러한 폭력이 무질서하고 우발적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동요시키고 부유층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미국과 부유한 라틴아메리카의 기득권층의 지시로 수행하는 국가 정책의 결과일 뿐이다.

1년 전, 미국과 리마 그룹(Lima Group, 베네수엘라 개입을 위해 구성된 미주지역 외교장관 협의체) 소속의 친미국가들이 베네수엘라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베네수엘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하이브리드 전쟁은 베네수엘라 경제를 옥죄어 최소 40,000명을 죽음으로 내몬 경제제재를 기반으로 구성되었으며,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극심한 불안을 야기했다. 이러한 불안은 특히 바로 인접한 콜롬비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은 짧은 성명서를 통해 콜롬비아에서 ‘충격적인 수’의 사회 및 정치 지도자가 암살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엔은 이러한 암살의 배후로 ‘FARC-EP 반군이 철수한 지역에서 불법 경제 활동을 자행하는 범죄조직과 무장단체’를 적시했다. 달리 말하자면 우익 준군사조직, 그리고 이러한 조직과 연관된 마약 갱단이 좌파가 합의한 평화협정을 악용하여 지방 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다. 트라이컨티넨탈 연구소는 2019년 12월 콜롬비아에 관한 Dossier에서 콜롬비아 기득권층이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평화가 찾아올 경우 콜롬비아 정치의 나침반이 민중 운동과 좌파로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암살과 협박을 통한 전쟁의 지속은 기득권층에 유리하며, 그들은 민주 정치보다 이러한 폭력을 선호한다. 1월 21일에 콜롬비아 민중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종식에서 암살단 같이 운영되는 억압적인 경찰 부대의 폐지에 이르는 다양한 요구를 들고 다시 거리로 나와 총파업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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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무토지농민운동(Movimento dos Trabalhadores Sem Terra, MST) 전국 위원회 소속 주앙 페드루 스테딜레는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난 쿠데타가 실패한 것에 대하여 21개 항목으로 평가했다. 핵심적 실패 요인은 우고 차베스가 1990년대에 시작한 볼리바르 혁명과정에 대항하는 우파 야당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미국이 정권교체를 위해 지명한 대통령 후보인 후안 과이도는 베네수엘라 정부 전복을 위한 갖가지 시도를 한 지 1년 후, 심각하게 분열된 야당 세력의 지지를 잃었다. 1월 5일에 투표를 통해 과이도에서 루이스 파라로 국회의장이 교체되었다. 미국은 파라가 야당 소속이기는 하지만 꼭두각시 역할로는 부적합하다고 판단, 신속하게 그를 제재하는 한편 과이도에게 개인적으로 정부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이 바로 기득권층이 선동하여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폭동’이다.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짓밟는 부자들의 폭동. 

1964년 콜롬비아가 끝없는 전쟁의 수렁으로 다시 떨어졌을 때, 반골 시인 호타마리오 아르벨라에스는 ‘전쟁이 끝난 다음’을 감동적인 시로 그려내었다. (영역: 니콜라스 수에스쿤)

그날
전쟁이 끝난 다음
만약 전쟁이 온다면
그 전쟁이 끝나고 다음날이 밝으면
그대를 내 품 안에 안을 거요.
전쟁이 끝난 다음날
만약 전쟁이 온다면
그 전쟁이 끝나고 다음날이 밝으면
그 전쟁이 끝나도 내게 팔이 있다면
그러면 당신과 사랑을 나눌 거요.
전쟁이 끝난 다음날
만약 전쟁이 온다면
그 전쟁이 끝나고 다음날이 밝으면
그 전쟁이 끝나도 사랑이 있다면
사랑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오늘날 세계에는 혼란의 여건을 조성하는 하이브리드 전쟁과 경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경제 전쟁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자행되고 있으나 여기에 맞서는 반전 운동은 없다.

경제 전쟁은 인간의 열망을 일그러뜨리고 꿈을 공허하게 비우며 희망을 깨부순다. 전 세계 69억 명이 가진 것보다 두 배는 더 많은 부를 누리고 있는 상위 1% 부자들이 0.5%만 세금을 더 납부한다면, 교육과 보건의료, 아동 및 노인 돌봄 분야에서 1억 1,7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유네스코(UNESCO)는 세계가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 중 교육 목표를 달성하려면 향후 15년 간 초등 교사 2억 4,400만명, 고등 교사 4억 4,400만명, 총 6억 8,800만명의 교사를 신규 채용해야 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아무도 이러한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다음날. 우리는 그날까지 얼마나 남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