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번역] 지금은 낙인 찍을 때가 아니라 연대해야 할 때

이 글은 트라이컨티넨탈의 “This Is the Time for Solidarity, Not Stigma: The Sixth Newsletter (2020).”를 번역한 글입니다.

2020년 2월 6일

그림: 맨발의 의사들

그림: 맨발의 의사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감염병에 걸린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감염병의 바이러스가 화난 수산시장에서 발생했다는 징후가 포착되었으나, 그에 대한 확신은 없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첫 한달 동안 수백 명을 바이러스에 감염시켰다. 중국 당국은 30개 도시에 1급 경보를 발령했고, 인구 1,100만 명의 우한시를 포함해 중국 전역 중 상당수의 도시가 완전 격리되었다. 1월 30일이 되자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약 10,000명에 달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적인 보건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WHO 기자회견에서 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중국 당국이 감염증 발병을 탐지하고, 바이러스를 격리하며,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하고 해당 정보를 WHO 및 세계와 공유한 속도는 매우 인상적이고 말로 다 할 수 없다. 감염증과 관련한 정보 투명성과 다른 국가를 지원하기 위한 중국의 의지 역시 인상적이다. 많은 측면에서 보면 중국은 실제로 감염증 발병에 대한 대응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가고 있고, 이는 절대 과장이 아니’라고 말했다. 치아오 공동체(미국 내 좌파 중국인 그룹)는 새로이 발표한 단편 보고서를 통해 이윤보다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비교했을 때 중국 사회주의 체제가 이러한 종류의 감염병의 유행의 대응에서 가지는 강점을 설명했다.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세 문장으로 말을 마쳤다.

지금은 공포가 아니라 사실을 추구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소문이 아니라 과학을 추구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낙인 찍을 때가 아니라 연대해야 할 때입니다.

사실 추구와 연대는 실로 중차대한 문제이다. 윌 로스 미국 상무부 장관은 코로나19 확산이 중국 경제에 타격을 입히고 미국으로 일자리를 다시 가져올 수 있기를 바란다는 기괴한 발언을 했다. 그가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제쳐두고라도, 해당 발언은 장관이 미국과 같은 나라의 공급망 회복력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은 자동차나 컴퓨터 말고도 훨씬 많은 분야에서 중국 제조산업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에서 약품 제조에 사용되는 제약 원료의 80%가 중국과 인도에서 생산되고, 미국에서 소비되는 비타민 C의 90%가 중국에서 생산된 제품이다. 또한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의 낙인이 아닌 연대에 대한 요청은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 즉, 제국주의 블록이 집착하는 듯한 무역 전쟁은 아니라는 것이다.

발언 중에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또한, 춘절 휴일에도 쉬지 않고 환자를 돌보고, 생명을 구하며 사태를 통제할 수 있게 만든 수천 명의 용감한 보건의료 전문가와 모든 일선 대응인력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 우한 훠선산 병원과 같은 새로운 병원을 건설하기 위해 자원이 투입되었고, 훠선산 병원은 경이로운 속도로 건설이 이루어져 2월 3일에 문을 열었다.

(동영상: 우한 훠선산 병원 건설과정)

중국 내 의사와 간호사도 감염 환자를 돌보고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자원해 우한으로 향했다. 상하이 의료처치 전문가 팀장인 장원홍 교수는 중국 공산당원인 의사와 의료인이 최전선에 서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동영상: 장원홍 팀장의 발언)

의사와 간호사가 공산당에 입당할 때, 인민을 섬기겠다는 맹세를 한다고 장 교수는 말했다. 이것이 지금의 그들을 있게 한 것이다. 우한 협화의대에서는 31명의 간호사가 교대근무를 준비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을 단축하고자 자신들의 긴 머리를 짧게 잘랐다. 공산당원인 청년 의사들은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앞다투어 병원으로 달려가 교대 근무를 자원했다. 국영기업은 경이적인 숫자의 마스크를 생산했으며, 식량 통제를 통해 기회주의자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예방했고, 바이러스 확산이 중국 GDP에 미치는 영향은 경제계획 전문가의 고려사항 중 하나로 분리되었다. 이윤보다 사람을 우선한 것이다.

사진: 백신 접종. 로엘 쿠틴호가 제트 인젝터(분사 주입기)를 사용하는 모습. 세네갈 지갱쇼르, 1973년

사진: 백신 접종. 로엘 쿠틴호가 제트 인젝터(분사 주입기)를 사용하는 모습. 세네갈 지갱쇼르, 1973년

트라이컨티넨탈은 사회주의 국가를 포함한 사회주의자가 의료 연대에 기울이는 막대한 헌신과 더불어 전 세계적인 의료 위기를 고찰했다. 처음 의문을 제기한 것은 볼리비아와 브라질이 자국 산업/농업 노동계급을 위한 보건의료의 기반이 되었던 쿠바 의사를 추방했을 때였다. 2014년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에볼라 전사들을 꼽았다. 에볼라가 서아프리카를 강타했을 때, 쿠바 의료계는 에볼라 퇴치를 돕기 위해 서아프리카로 갈 것을 결의했다. 서아프리카로 향한 간호사와 의사 중 가장 많은 수인 256명이 쿠바에서 왔다. 그들의 헌신이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지는 쿠바 의료진 중 한 명이었던 펠릭스 바예즈 박사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는 에볼라에 감염되어 스위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 후 쿠바의 자택으로 돌아갔다가 시에라리온에서 활동하는 동료 의사를 돕기 위해 다시금 아프리카로 향하기를 원했다. 한 달 후, 그는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에서 두 시간 떨어진 포트 로코로 가 업무에 복귀했다.

우한 폐병원 중환자실 원장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하던 초기에 감염되었다. 완치된 후, 그 역시 펠릭스 바예즈처럼 병동으로 복귀했다. 그에게는 자신과 같은 사회주의자 의사를 필요로 하는 환자가 있었다.

그러나 2019년 9월에 미국은 의사를 인신매매한다며 쿠바 정부를 몰아세웠고, 브라질의 보우소나로는 브라질 내 8,300명의 쿠바 의료인력을 ‘노예 노동자’라고 불렀다. 보우소나루가 사회주의적 헌신을 노예제로 바라보는 것에서 보우소나루와 쿠바 의사가 가지는 세계관의 차이를 분명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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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트라이컨티넨탈의 25번째 Dossier, 민중 종합 진료소: 텔루구 공산주의 운동의 이니셔티브(2020년 2월)에서 민중 의료분야에서의 놀라운 실험(자신의 부귀영화보다는 민중을 섬기려는 공산당원 의사가 운영하는 종합 진료소)을 다룬 것이다. 대영제국이 몰락했을 때, 인도 의료진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 말기, 인도에 의료 체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인도인 7,200명당 1명 꼴로 의사가 있었을 뿐이다. 인도는 독립을 하기는 했으나 문해율이 11%에 불과하고 빈곤 수준도 경악할 정도인 상태에서, 독립은 현실이라기보다 야망에 불과했다.

인도 내 텔루구 언어 사용 지역(현재 인구 8,600만명)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의사들이 넬로르 민중 종합 진료소 등을 필두로 하는 의원과 병원을 세워 노동계급과 농민계급에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종합 진료소에서는 의료 처치를 할 뿐만 아니라 공중보건 문제를 농촌 오지와 소도시로 확산할 의료 노동자를 훈련시켰다. 이 종합 진료소를 창설한 사람 중 한 명은 전업 혁명가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공산당 대표인 P. 순다라야가 그에게 민중의 의사가 되는 것 자체가 바로 혁명적 활동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25번째 Dossier를 통해 세간의 이목에서 벗어나 활동하는 좌파 의료진, 그리고 보건의료 민영화를 약화하기 위한 의료 실험에 대해 알 수 있다. 중국 장원홍 교수, 쿠바 펠릭스 바예즈 박사, 인도 P. V. 라마찬드라 레디 박사의 헌신은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가라데 수련 중인 P. V. 라마찬드라 레디 민중 종합 진료소 간호 전문대 학생/출처: 넬로르 민중 종합 진료소

가라데 수련 중인 P. V. 라마찬드라 레디 민중 종합 진료소 간호 전문대 학생/출처: 넬로르 민중 종합 진료소

또한 이들 의료진과 이라크 공산당 및 이라크 여성연맹 지도자였던 나지하 알 둘라이미 박사는 서로 다르지 않다. 알 둘라이미 박사는 1940년대에 바그다드에 있는 의대에서 수학했고, 1948년 1월 앵글로-이라크 조약의 갱신을 반대하는 알와스바(‘도약’이라는 의미) 봉기 등 반제국주의 운동에 휩쓸렸다. 의대 졸업 후 왕립 병원에서 수련을 거친 뒤 카르크 병원에서 일했다. 알 둘라이미 박사는 바그다드 샤와카구에 무료 진료소를 세웠다.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처벌로 당국은 박사를 술라이마니야, 카르발라, 움라 등 전국 각지로 전근을 보냈다. 그녀는 전근 가는 곳마다 무료 진료소를 열고 빈곤층에 봉사했다. 알 둘라이미 박사는 이라크 남부지방에서 일하면서 아동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매종을 비롯한 베젤(非성병성 매독)균을 근절하려 했다. 1958년 이라크 혁명(이라크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제 수립) 이후, 알 둘라이미 박사는 지자체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바그다드에 알 트와르(‘혁명’이라는 의미)구의 건설과 여성주의적인 1959년 민법의 통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트당이 집권하자 그녀는 망명을 갔지만, 말년까지 민중의 의사이자 공산주의자로 살았다.

그림: 나지하 알 둘라이미 박사

그림: 나지하 알 둘라이미 박사

알 둘라이미 박사가 살아있었다면 우한과 후베이성 다른 지역으로 간 의사와 간호사의 대열에 동참해 코로나19를 퇴치하는 데 힘을 보탰을 것이다.

1960년 8월, 체 게바라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혁명적 의학에 대해 강의했다. 그는 강의 수 개월 전, 급여를 더 주지 않으면 농촌지역 근무를 거부하겠다는 한 무리의 의사에 대해 언급했다. 체는 우리의 인류애를 방해하는 자본주의 논리가 기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는 정상적인 것이라고 했다. 혁명적인 쿠바가 의사가 되려는 학생에게 학비를 받지 않고, 대신 사회적 부로 청년 인구를 의사로 키웠다면 어땠을까. 또는, ‘마법처럼 2-300명의 농민이 의대를 졸업한다면’ 어땠을까. 쿠바는 1958년에 의사 1명당 돌보는 인구가 약 1,051명이었다. 아바나 의과대학은 1953년 독재 당시 폐쇄되었다가 1959년에 다시 문을 열었지만 전체 161명 교수진 중 23명만이 남았다(나머지 의사는 미국으로 도피했다). 혁명은 농민계급에게 의지했고, 농민계급은 의학을 공부해 엄청나게 헌신적인 정신으로 쿠바의 의술을 세계 곳곳과 나누기 위한 임무에 나섰다. 오늘날 쿠바에서는 의사 1명이 돌보는 인구 수가 384명이다. 이러한 쿠바의 의료 노동자와 인도 종합 진료소, 중국의 의료 노동자는 체의 말을 빌어 ‘새로운 연대의 무기’이다.

지금은 낙인 찍을 때가 아니라 연대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