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베네수엘라 총선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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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욱 선생과 나는 베네수엘라 총선 국제참관단의 일원으로 국제전략센터의 추천을 받아 2015년 12월 6일 시행된 베네수엘라 총선 과정을 둘러보았다. 베네수엘라의 선거관리 시스템, 특히 투개표 시스템은 본인 인증부터 터치스크린 방식의 투표과정과 후보별 득표의 집계까지 자동화, 전산화되어 있고 그 공정성과 투명성은 지난 십수년 동안의 시스템 운용 과정에서 이루어진 각 정파와 베네수엘라 시민사회의 감시와 감독, 카터 센터와 미주기구 등 국제적 감시 등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긍정적인 평판을 쌓아 왔다.

이런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최근 베네수엘라 정부는 더 이상 각종 선거과정에서 국제감시단을 초청하지 않고 국제 참관 프로그램에 따라 세계 각지의 정당과 비정부기구 인사들을 초청하여 베네수엘라 선거제도와 투개표 시스템에 관해 전세계를 상대로 한 홍보를 강화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참관단은 일정한 의견을 제출하며 이 의견은 다시 투개표 시스템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예외적으로 남미국가연합UNASUR 차원의 선거감시단을 초청하였다.)

총선을 앞두고 미국과 EU 국가들은 공정한 선거를 위해 “중립적인” 선거감시단을 받아들이라고 베네수엘라 정부를 압박하였다. 베네수엘라 국가선관위(CNE)는 이런 압력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는 이미 국내의 다양한 정파들 사이에서 투개표를 포함한 선거관리 시스템의 공정성과 투명성, 정확성에 관해 오랜 기간의 토론과 경험을 통해 합의를 이룬 상태이므로 선거과정에 대한 외세의 개입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베네수엘라 선거권력의 입장이었다. 특히 미국이 주도하는 미주기구(OAS)는 과거 아이티 대선에 감시단을 보내 선거결과를 뒤집은 전례가 있다. 당선자가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좌파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의혹이 큰 선거라 하더라도 미국에 우호적인 인사가 당선되면 그 선거를 공정하다고 평가하였다.

베네수엘라 국가선관위가 미국 국무부가 주도하는 선거감시활동을 불안정화공작의 일환으로 의심하고 거부한 것은 이런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선거 전에 이미 베네수엘라 여당인 통합사회주의당이 주도하는 좌파연합의 선거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그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브라질 중앙선관위는 베네수엘라의 국제선거 감시단 수용거부를 이유로 남미국가연합(UNASUR) 의 선거감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는 남미의 좌파 정권들 사이의 연대가 아직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남미국가연합과 국제선거참관단은 선거과정이 끝난 12월 7일 선거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각 참가단위에서 제출된 보고서를 검토해보면 모든 참관단체들이 베네수엘라 선거과정이 큰 문제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중립성과 투명성이 잘 확보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선거결과와 해석, 각 정파의 반응

선거전부터 집권 통합사회주의당의 패배가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으나 선거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전체 의석 165석 가운데 PSUV 주도의 볼리바르 연합은 55석을 얻는데 그쳤다(득표율은 42%). 야당연합인 MUD는 112석의 의석을 확보하여 총 의석 수의 2/3 이상을 확보하였다(득표율은 57%).

집권여당의 패배는 쓰디쓰지만 역설적으로 온갖 방해를 뚫고 성장한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가 아주 견고하며 베네수엘라의 선거 시스템이 완벽하게 공정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즉 민주주의는 승리하였다. 현 대통령인 마두로가 2013년 4월 보궐선거에서 신승한 이후 베네수엘라 야권은 부정선거로 마두로가 이겼다고 주장하면서 전국적으로 사보타지와 폭력시위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주로 여당지지자들과 공무원, 경찰, 군인 들이 폭력으로 사망하였다. 그런데 이제 선거의 공정성은 다시 한번 입증되었고 마두로의 대통령 당선은 비록 표차가 적다하더라도 확실했음이 확증되었으며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은 그 빛을 잃었다.

이제 단원제 의회에서 MUD는 원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고 기존 법률을 폐지하며 주요한 정무직 공무원을 해임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헌법개정을 의결할 수 있는 권한(물론 국민투표를 거쳐야한다)마저 가지게 되었다. 그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대법원장, 중앙 선거관리위원도 갈아치울 수 있다.

그러나 야당연합이 국회를 지배한다고 하여 모든 국가권력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베네수엘라는 5권분립이 헌법상 명시되어 있고, 각각의 권력은 서로를 견제하도록 균형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이제 야당연합은 그 중 한 권력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다른 권력의 구조를 변화시키려 하겠지만 여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그리고 헌법상 규정된 인권보호 원칙을 거스르는 어떤 입법도 불가능하다.

한편 마두로 대통령은 개표가 한창이던 7일 새벽에 이미 선거패배를 선언하고 볼리바리언 혁명세력으로 하여금 길거리의 공개된 토론을 요청하였다. 여기에 호응하여 지역사회 조직가, 노동조합 간부, 농민운동과 다양한 사회운동의 활동가들과 일반 당원들 사이에서 볼리바리언 혁명의 진로와 운동방식에 대한 철저한 반성적 검토가 행해지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의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길거리로부터 왔다. 이제 우리는 길거리로 돌아가야 한다.”

선거 전의 상황을 보면 베네수엘라의 부르주아지는 이른바 경제전쟁을 통하여 볼리바리안 혁명을 좌초시키려 시도하였다. 외환시장의 혼란, 매점매석, 암시장으로 석유와 물품을 빼돌리기 등을 통하여 정부의 경제정책의 일부를 부르주아지와 타협하도록 유도하였다. 환율시장의 안정화를 목표로 한 마두로 정부의 일정한 타협은 혁명세력 내부의 반발을 가져왔으며 차베스 대통령과 한 팀을 이루었던 원칙주의자 관료들을 퇴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제유가의 폭락은 혁명정부의 선택폭을 더욱 갉아먹었다. 석유의존경제에서 탈피하지 못한 베네수엘라로서는 국제 에너지가격의 폭락은 국고수입의 축소와 재정운용의 장애를 가져왔다.

제임스 페트라스 교수는 최근 아르헨티나 대선에서의 좌파의 패배와 브라질에서의 노동자당의 실패, 베네수엘라 총선에서의 집권좌파의 패배등을 분석하면서 그 패배의 원인이 혁명이 보다 급진화되지 못한 점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의 복귀 시도가 불임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현 좌경화바람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모순에 대한 대중적 자각의 결과이다. 이들 대중이 과연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용납할 수 있을까? 만약 행정부 권력(아르헨티나)이나 의회권력(베네수엘라)을 장악한 부르주아 세력이 신자유주의 복귀시도를 할 경우 정세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아르헨티나에서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마끄리는 선거과정에서 “깜비아모스(변화합시다)”를 외쳤는데, 이는 그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내보였을 경우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계산했기 때문이다. 당선 후 그는 미국의 벌쳐 자본과의 타협을 주장하고 국영회사의 사영화, 취약계층과 국내산업에 대한 국고보조의 철폐 등 신자유주의 정책방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과연 이런 신자유주의로의 복귀가 성공할 수 있을까?

베네수엘라 야권은 더욱 신중하다. 이미 대선 때 카프릴레스는 자신이 우익후보가 아니며 차베스 정책의 계승자인 것처럼 포장하였다. 볼리바리안 혁명이 가져온 성과를 부정하였다가는 선거에서 승산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마두로 정부에 대해 야권의 효율적인 투쟁을 가로막는 요인은 MUD가 선거승리를 위해 미봉된 선거연합이며 그 내부의 통일성이 매우 약하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공통의 적에 이기기 위해 연합은 하였지만 그들은 결코 한 세력이 될 수 없다.

인플레율이 200%에 근접하고 볼리바르화의 가치는 폭락하고 있으며 시장에서 생필품을 사기가 어려운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이 이른바 ni-ni 그룹(차베르 지지자도 야당의 지지자도 어닌 사람들)의 이탈을 가져왔다. 그러나 최악의 조건에서도 42%의 인구는 혁명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집에 있으면서 투표장에만 한번씩 나오는 유권자가 아니라 대부분 길거리에서 혁명에 대해 토론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세력이다. 이들이 지금까지의 혁명과정에 대해 비판적인 검토를 하고 새로 각오를 다지는 작업이 이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전망

볼리바리안 혁명세력은 혁명이 개시된 1998년이래 17년만에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풀뿌리 운동에서 출발한 볼리바리안 운동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적 개혁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내부적 모순이 싹텄다. 그 중에 하나는 이른바 볼리부르주아지의 성장이다. 이들은 혁명에 동의하면서 국가기구의 많은 지위를 차지하였고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처지를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였다. 그 결과 대중운동의 근저에 일정한 모순이 발생하였다.

많은 운동가들이 국가기구에 참여함에 따라 대중운동 그 자체는 약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경제가 호황일 때 이런 내부적 모순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악화된 경제적 상황에서 내부 모순은 체제의 위기로 곧바로 전화된다.

결국 혁명 속의 혁명의 지체가 총선에서의 패배라는 위기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정부가 그동안 만들어왔던 국가기구의 개조는 부르주아지의 반동시도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판을 마련해주고 있다. 군부는 볼리바리안 혁명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으며 병사들도 일반 인구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급진화되어 있다. 볼리바리암 헌법을 기초로 지금까지 시행된 사회적 인권에 대한 보호장치를 우파세력이 손대려 시도한다면 커다란 계급투쟁을 거쳐야 할 것이다. ni-ni 그룹의 우파 지지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들은 결코 현 볼리바리안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꿀 생각이 없으며 집권세력의 무능함에 반응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마두로 대통령이 길거리로 돌아가자라고 호소한 것은 혁명이 단순히 물질적 조건이 개선된다고 그 기초가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 체 게바라가 말한 사회주의적 인간, 즉 공동체의 요구를 떠안고 실천하는 인간의 형성을 조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석열(충북대 사회학과 교수, 국제전략센터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