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 2011년 칠레 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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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학생운동 덕분에 칠레 정부는 향후 4년 이내에 완전 무상교육 달성의 일환으로 가난한 학생 50%에게 대학 등록금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 성과와 향후 방향을 알려면 2011년 학생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2011년 학생운동은 대학 및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전국적인 연속 시위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칠레 민주화 이후 가장 강력한 운동 중 하나이다. 세바스띠안 삐녜라 정부 집권 후  2년 후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과 더불어 이 운동은 칠레 군부독재 시절(1973-1990)에 확립되어 20년 넘게 실질적인 변화 없이 지속되어온 경제 및 정치 제도에 대해 상당한 개혁을 요구하는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일환이었다. 이 개혁의 목표는 높은 소득 불균형을 줄이는 것이었다. 6%의 탄탄한 연간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칠레는 OECD 국가 중 가장 불평등하게 소득이 분배되는 국가이다. 그러나 세금과 정부 조치는 부자들만을 위한 것으로 사회 경제 격차 감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칠레 학생운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질 높은 교육 기회를 제공해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변화들을 요구했다. 이 시위는 국가보다 민간 부문이 상대적으로 교육에 더 많은 관여를 허용하는 칠레의 교육 시스템을 거부했다. 첫 번째 시위는 5월 12일 산티아고에서 칠레학생연맹(Confech)이 교육 재정 부족, 장학금 지급 지체, 학생 교통카드 관련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시작되었다. 이는 칠레학생연맹이 수도권 학생 15,000 명 이상을 조직한 첫 번째 전국 시위였다. 5월 21일 의회에서 세바스띠안 삐녜라가 교육 정책을 천명하기 전에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연설을 들은 칠레학생연맹은 정부의 안이한 조치들에 강하게 반발하며 5월 26일 또 한번의 시위를 조직하였다. 이 때 중•고등학생 2000 명을 비롯해 산티아고에서 8,000 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학생들은 정부가 교육에 대해 더 많이 책임 질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호아킨 라빈 교육부 장관에게 제출했다.

교육 부문의 전국적인 시위 한 달 후, 정부는 새로운 교육 기금을 마련하고 학생 대출을 용이하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첫 제안서를 내놓았다. 주요 단체들은 더 실질적인 대안 마련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했다. 정부의 잇따른 제안으로 시나 기초단체가 아닌 국가가 직접 고등교육을 책임지고 양질의 교육을 보장하는 법률적 변화와 같은 교육 제도 개혁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대책은 부족하다는 이유로 수용되지 못했다.

학생운동의 급진화

6월 8일에 산티아고에 있는 칠레대학과 칠레중앙대학 학생들은 기독민주당 당사 앞에서 공공 교육에 대한 그들의 “일관적이지 않은” 자세와 칠레중앙대학 같은 사립대학을 기업화하려는 행태에 대해 항의하였다.

6월 11일, 대학 및 중•고등학생들은 다음 주 행진을 요구하며 학생운동의 ‘급진화’를 선포하였다. 6월 15일에는 고등학생과 파업 노동자들도 합류했다. 광산 노동자의 합류는 이 운동에 다른 부문이 합류한 처 사례가 되었다. 7000명이 함께 했고 시위대와 경찰이 알마그로 공원에서 충돌하였다. 6월 16일, 칠레학생연맹과 교육대학은 군부 독재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를 조직하였다. 산티아고에서만 8만에서 10만 명, 전국적으로는 2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사립대학도 동참하였다.

중•고등학생들이 조직한 6월 23일 시위에는 20만 명이 산티아고 중심에 모였다. 같은 날, 교육부 장관은 학생들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한 제안서를 들고 중•고등학생 지도부와 만났다. 중•고등학생들은 이 국회 제안서를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칠레학생연맹도 대학생을 위한 정부안을 거부했다.

시위가 칠레 사회에 끼친 영향

시위 초기에는 대중의 지지가 미온적이었다. 6월 중순에는 단지 37%만이 시위를 지지했다. 하지만, 시위 두 달 만에 인구의 약 70%가 학생운동이 주장하는 요구를 지지하였다. 한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급락한 정부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어 연이은 내각 개편을 단행해야 했다. 궁극적으로 학생 시위는 세바스띠안 삐녜라 정부에게 패배를, 사회당 미첼 바첼레트가 이끄는 중도 좌파 연합에게는 승리를 안겨줬으며 무상교육의 초석이 되었다.

작성: 마띠아스 바예호스(칠레 학생)

번역: 홍정희(번역팀, IS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