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아프리카 이해하기 2부: 식민주의에서 신식민주의에 이르기까지

                    (출처:  orondeamiller.com )

                   (출처: orondeamiller.com)

글: 프레드릭 카수쿠(영 소셜리스트 리그, 케냐)
편집: 송대한(The 숲 영문판 편집장, ISC), 스테파니 박(교열팀, ISC)
번역: 홍정희, 예선희, 지민경(번역팀, ISC) 심태은(The 숲 한글판 편집장, ISC)

[본 글은 케냐의 영 소셜리스트 리그[1]의 활동가 프레드릭 카수쿠[2]가 아프리카의 역사와 현재의 사회정치 및 경제적 현실을 분석한 것으로, 총 3부에 걸쳐 연재할 시리즈의 두 번째 글입니다.] 

오늘날의 아프리카 이해하기 1부 

아프리카에는 식민지 통치에 대한 두 가지 반응, 즉 협력과 저항이 있었다. 유럽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았던 초기에는 일단의 유럽인과 협력하여 다른 유럽 침략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죽음과 파괴를 피하고자 했다. 유럽인에 협조적이었던 아프리카인 대부분이 배신당하고 식민지화되면서 유럽의 의도가 명확해지자 아프리카의 협력은 저항으로 바뀌게 되었다. 수 년 후, 민중 봉기로 식민지배를 종식시켰지만, 오히려 신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협력은 거의 항상 경제와 군사 지원을 대가로 외교, 적응 및 동맹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협력했던 아프리카인 대부분은 결국 배신당하고 식민지화되었다. 필자의 나라인 케냐를 보면, 케냐 서부 왕가족의 나봉고 무미아 왕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 강화를 약속 받고 너무도 쉽게 식민지화에 협력했다. 유럽인이 등장하기 전, 무미아 족장이 속한 루히아족[3]은 루오족, 카브라족, 부쿠수족과 조화롭게 무역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영국이 식민지배에 맞섰던 루오족, 카브라스족, 부쿠스족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이자 무미아 왕은 자국의 전사를 보내 영국 편에서 싸우게 했다. 그 이유는 영국이 그의 충성심에 대한 대가로 루히아족 전체를 통솔하는 최고군주 자리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물론, 무미아 왕은 그런 칭호를 얻지도 못했다. 1920년에 영국은 케냐공화국을 식민지로 선포하고 영국 왕실이 케냐를 통치하기에 최고군주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초기에 이러한 일들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비일비재했다. 케냐에서는 키쿠유족[4] 와이야키와 힝가 족장은 부족을 위한 지속적인 자치와 더 큰 부를 대가로 유럽 상인들에게 식량과 물을 제공했다. 그러나 키쿠유가 경계를 풀자마자 유럽인들은 부족을 급습하여 식민지화하고, 족장을 붙잡아 투옥시키고 살해했다. 잠비아에서는 로지족의 최고군주 레와니카가 영국과 협력하여 적으로부터 부족을 보호하고 부족민과 부족 사회에 도움이 될만한 서양의 지식을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레와니카는 조건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영국과 조약을 맺었다. 영국은 더 나은 정부 모델을 수립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구실로 식민지 행정부를 구성하여 결국엔 레와니카의 권력을 박탈했다.

유럽과의 협력이 식민지화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아프리카는 지역운동을 활용해 유럽에 저항했다. 1929 년 나이지리아에서 이그보족 여성들은 정부 안에서의 여성 역할을 제한하고, 재산을 압류하고, 가혹한 지역 규정을 강요하고, 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수감하는 것에 반대해 임명 군주(이그보같이 전통적 관할 지역이 없는 곳은 영국 정부가 원주민 부역자에게 "임명장"을 주어 영국을 대신하여 현지에서 통치활동을 했다.)에게 항의했다. 여성들은 그러한 임명 군주의 "위에 앉는(여성들이 문제를 일으킨 남성이 사는 곳 또는 직장에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자신들이 그 남성에 대해 가진 불만과 고충을 자세하게 털어놓는다. 여성들은 종종 해당 남성의 거주지를 부수거나 진흙을 발라놓기도 한다. 아내를 학대하거나 여성의 시장 규칙을 위반하면 이러한 행동으로 처벌했다)" 것으로 집요하게 압박해 결국 자신들의 요구에 따르도록 했다. 이러한 시위로 새로운 정치 제도가 시행되었다. 임명 군주가 부족민들이 선출한 판사로 이루어진 “대중 판사제”로 바뀐 것이다. 이그보족의 투쟁은 1938 년의 조세 시위, 1940 년대 제유공장 시위, 1956 년 조세 봉기 등 다른 많은 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이그보족 만큼 성공한 저항운동은 거의 없었으며 대개 독립을 성취한 저항운동도 아프리카 대리인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보통이었는데, 결국에는 지역운동을 배반하고 식민지 행정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독립을 이끈 요인
사회 정치적 혼란이 아프리카 독립에 “내부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면, 외부적 요소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장 중요한 외부 요인 중 하나는 2 차 세계대전이다. 유럽 식민 통치자들은 추축국(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연합국에 대항해 형성한 동맹)과 싸우는데 아프리카인을 동원했다. 이렇게 참전한 아프리카인들은 평등과 정의, 자결권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자 이들은 백인 식민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다. 또한 유럽은 전쟁 군수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광산과 농업에 대한 식민지 착취를 강화했다. 이것은 식민지에서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또 다른 주요 요인은 국제 사회주의의 주축인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출현이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대중화를 위해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의 탈식민화를 적극 지지했다. 러시아 혁명은 많은 아프리카 해방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 혁명은 1919 년 영국 점령에 맞선 이집트의 전국적 저항운동에 영감을 주었으며, 남아공에서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독립 운동가들을 고취시켰다. 후에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러시아 혁명 열풍이 불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소련이 특히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식민지에 외교적,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1975 년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앙골라는 내전에서 소련과 사회주의 동맹군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앙골라해방인민운동이 권력을 잡았다.

마지막 요인은 미국의 부상이다.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비교적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쟁 중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유럽에 전쟁 물자를 공급했다. 전쟁 후에는 기회의 땅, 아프리카에 제조품을 수출하고 투자하기 위해 미국은 "문호개방정책"을 펼쳤다. 즉, 아프리카 시장 개척을 위해 미국은 아프리카의 탈식민화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탈식민화로 소련 사회주의의 영향력에 맞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킬 수 있었다.

독립투쟁과 그 이후
가나가 독립한 1957년부터 짐바브웨가 독립을 선언한 1980년까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유럽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무장 게릴라가 숲에서 싸우는 동안 유럽에서 교육받은 아프리카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주권협상에 나섰다. 다른 나라에서는 도심 시위로 힘을 얻은 정당이 집권했다. 결국, 유럽과 아프리카 국가의 엘리트 간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는 모든 해방운동을 무력화했다. 토지를 되돌려주거나 부를 재분배하기는커녕, 오히려 새롭게 부상한 엘리트들의 손에 간단히 넘겨주었다.

독립운동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영국에 대항해 1952년에 결성된 케냐의 마우 마우단이다. 마우 마우단은 제2차 세계 대전당시 왕실 아프리카 라이플 연대(1902년부터 1960년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할 때까지 동아프리카 지역의 영국 식민지에서 차출된 아프리카인으로 구성된 영국 군대) 소속으로 미얀마에서 영국을 위해서 싸웠다. 그들이 영국군으로서 복무를 마치고 고국인 케냐에 돌아왔을 때, 백인들이 자신의 땅을 가로챈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군에서 다른 유럽인과 전쟁을 벌였던 경험은 이들로 하여금 백인이 천하무적이라는 관념을 깨뜨렸고, 마우 마우단은 언덕이 많은 지형을 이용해 백인들을 공격했다. 마우 마우단의 귀환은 조모 케냐타가 1974년에 케냐 아프리카 연맹(후에 케냐 아프리카 민족연합당)의 의장이 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온 시기와 일치했다. 케냐타는 마우 마우단을 찾아가 그가 도시에서 식민지배자들과 협상을 하는 동안 마우 마우단은 숲과 교외에서의 투쟁할 것을 제안했다. 그 대신, 독립 후에는 마우 마우단이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고 마우 마우단 장군에게는 그에 합당한 군 고위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우 마우단은 식민지배자로부터 탄약과 총을 탈취했고, 영국 군대에서 쌓은 지식을 사용해 이들에 대항했다. 그렇게 케냐는 1963년에 독립해 1964년에 공화국을 수립했고, 케냐타를 초대 총리로, 그리고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독립을 쟁취한 직후, 케냐타는 마우 마우단에게 그들의 토지를 되돌려 받고 싶으면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하면서 숲에서 나올것을 명령하며 마우마우단을 배신했다. 마우 마우단이 이 명령을 거부하자, 단원들은 추격대에 쫓기게 되었고, 살해당했으며, 케냐 독립 쟁취에서 마우 마우단이 했던 역할에도 불구하고 불법 단체로 규정되고 말았다.

또한 1975년 남아공 소웨토 지역에서는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일련의 도심 시위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러한 봉기에는 공교육에 영어에 더해 네덜란드어에 기초한 아프리칸스어(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미비아에서 주로 쓰이는 서게르만어군 언어이다. 16세기 ~ 17세기에 네덜란드 출신 이주자들의 후손이 써오던 네덜란드어가 독자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성립된 언어이다.를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흑인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가 포함되었다. 3,000명에서 10,000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정부의 불합리한 명령에 반대하여 평화롭게 행진하며, 아프리칸스어를 거부하는 현수막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모국어인 줄루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무장하지 않은 채 평화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에게 최루가스와 실탄을 발사했고, 그로 인해 700명이 사망하고 천 여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는 전국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면서 이듬해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무너졌다. 이 시위를 통해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서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주도적 역할이 정립되었다. 학생들이 원했던 것은 억압적인 백인 아프리카너(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네덜란드계 백인)를 완전히 축출하는 것이었으나,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반인종차별주의”가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장악했고, 이들은 백인 아프리카너가 남아프리카에 남는 것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흑인 원주민을 희생양으로 새롭게 부상한 흑인 부르주아와 함께 계속해서 남아프리카의 경제를 지배하도록 하고 말았다.

 
        1. Young Socialists League
        2. Fredrick Kasuku
        3. Luhya 아발루히아('한 집안 사람들'이란 뜻)를 줄인 말. 부쿠수, 타조니, 왕가, 마라마, 초초, 티리키, 니알라, 카브라, 하요, 마라치, 홀로, 마라골리, 다코, 이수카·, 키사, 니올레, 사미아족 등을 포함한 종족집단.
        4. Agikuyu 키쿠유 부족은 케냐 중부의 케냐 산 주변 반투족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