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동아시아의 이중 구속: 신냉전 속 모순과 가능성
* 본 기사는 2026년 6월 2일자 트라이컨티넨탈 사회연구소의 “East Asia’s Double Bind: Contradictions and Possibilities in the New Cold War”를 번역한 글입니다.
번역: 황정은
감수: 심태은
미국 군사력에 대한 의존과 중국과의 긴밀한 경제적 통합 사이에 낀 일본, 한국, 필리핀, 대만은 신냉전이 동아시아를 재편함에 따라 심화하는 모순에 직면하고 있다.
2026년 6월 2일
이 도시에에 실린 이미지는 트리컨티넨탈 예술부가 편집한 것으로, 수 세대에 걸쳐 전쟁과 점령에 맞선 역사를 기리는 오키나와 조각가 긴조 미노루의 작품을 조명하고 있다. 긴조는 수십 년 동안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일반적으로 2차 세계대전으로 알려짐) 당시와 그 이후에 자행된 참혹한 폭력과 잔혹한 역사를 조각했다. 긴조는 콘크리트, 석고, 금속을 주재료로 작업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소재는 현재 오키나와에 또 다른 미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쏟아붓고 있는 것과도 같다. 오늘날 신냉전의 최전선이 된 오키나와에서 긴조의 조각 작품은 기억이자 물질적 반박으로 서 있다. 이는 결코 매끈하게 다듬어져 지워지기를 거부하는, 거칠고 무거운 역사이다.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에 대한 불법적인 침략 전쟁을 시작했을 때,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행 제한으로 보복할 것이란 점은 자명했다. 이란은 지금까지 한 번도 호르무즈 해협을 폐쇄하거나 통행을 제한한 적이 없지만, 이란 정부는 도발 시 호르무즈 해협의 지정학적 위치를 자국 방어 전략으로 활용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아시아 국가에 호르무즈 해협과 말라카 해협은 상품, 특히 에너지가 이동하는 핵심 통로이자 전략적 병목지점이다. 일본 원유 수입량의 약 90%, 한국 원유 수입량의 약 75%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해협의 통행이 조금만 지연되어도 에너지 소비가 많은 동아시아 산업 경제는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경제적 관점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전쟁은 일본과 한국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페르시아만의 원유에 의존하는 모든 아시아 국가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많은 아시아 국가는 외교적으로 침묵하거나, 일본과 한국의 경우처럼 공개적으로 미국을 지지했다.
한국과 일본 같은 나라가 자국의 경제적 이해를 등지면서까지 미국 편에 서는 이유는 이들 국가가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군사 체제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에 대규모 미군기지가 계속 주둔함으로써 이들 국가는 미국의 끝나지 않는 전쟁에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에 군사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한, 한국과 일본은 이란 전쟁 문제에서 미국과 결별할 수 없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겨냥하는 주요 군사적 대상은 이란이 아니라, 일본, 한국, 필리핀, 대만을 비롯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국인 중국이다. 중국이 동아시아 산업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를 고려할 때, 중국에 대한 군사적 공격은 동아시아 전체의 발전 모델을 뒤흔들 수밖에 없다. 반면 미국은 여전히 일본, 한국, 필리핀, 대만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후원국이며, 많은 경우 주요 수출 시장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이들 나라의 경제는 이중 구속에 빠져 있다. 미국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의존에서 쉽게 벗어날 수도 없고, 동시에 '새로운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과의 필수적인 경제 관계를 단절할 수도 없다.
<동아시아의 이중 구속: 신냉전 속 모순과 가능성>에서 우리는 일본, 한국, 필리핀, 대만이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지속되는 어려운 모순 속에 어떻게 놓여있는지 살펴본다. 동아시아를 집중적으로 보겠지만, 현 정세에서 호주와 인도 같은 국가가 수행하는 역할도 간략히 분석한다. 이 도시에에서는 주로 경제적, 지정학적 모순을 다루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적 동맹에서 벗어날 필요성을 보여줌으로써 이들 사회에서 계급투쟁을 발전시킬 가능성 또한 제시한다.
동아시아와 중국의 역할
지난 30년 동안 일본, 한국, 필리핀, 대만의 무역 패턴과 발전 경로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냉전 시기에는 미국이 이 지역 경제 질서의 중심축이었고, 20세기 후반에는 일본이 그 뒤를 이었다. 오늘날 새로운 중심축으로 부상한 중국은 이들 국가의 경제 전반에 걸쳐 정도는 달라도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각국의 발전 모델과 중국 정부와의 정치적 관계는 서로 다르지만, 네 나라 모두 중국이 제조업 중심지이자 공급망의 핵심축, 최대 시장으로 기능하는 생산 네트워크에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다.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의 연구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경제적 중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중국은 한국과 일본의 단일 최대 무역 상대국이며, 각국 수출의 약 20~25%를 차지한다. 대만은 중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수출의 30~40%가 중국으로 향한다. 필리핀은 상대적으로 통합 정도가 낮지만, 중국은 여전히 필리핀의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서 수출의 약 15~20%를 흡수하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동아시아 경제활동의 상당 부분이 중국 산업의 수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전체 경제 규모와 비교해 보면 중국의 중요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중국과의 무역, 특히 대중국 수출은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10%를 차지한다. 대만의 경우 GDP의 4분의 1이 중국 본토와의 무역과 연관된다. 내수 중심 경제인 일본 역시 GDP의 약 5%가 중국 수출과 연결된다(일본 내 120개의 미군 시설이 미치는 경제적 영향을 포함하여 미국과 관련된 GDP 수준에 상응). 필리핀은 수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지만, GDP의 약 6%가 대중국 수출에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 경제의 활력은 동아시아 전역의 생산, 고용, 투자 수준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2011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아세안 회원국은 역내 경제 통합을 위한 지역 체계를 구축할 필요성을 논의했다. 이러한 논의는 결국 2020년 서명하고 2022년 1월 발효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으로 이어졌다. RCEP은 전 세계 인구의 약 30%, 세계 GDP의 약 30%를 포괄한다. 뉴질랜드부터 일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경제권을 포함하며, 광업에서 첨단기술 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과 22억 명 규모의 소비시장을 아우른다. RCEP 조인국은 20년에 걸쳐 관세의 92%를 감축하거나 철폐하기로 합의했다. 일본, 한국, 필리핀은 모두 무역 흐름을 강화하고 중국이 최대 경제 규모를 차지하는 상호 연결된 경제 공간을 제도화하는 RCEP의 조인국이다.
무역의 총량이라는 수치 이면의 생산 구조 역시 이러한 통합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최종 소비시장일 뿐만 아니라 중간재의 주요 소비국이자 생산국으로서 역내와 세계 산업 사슬의 핵심 연결점이다. 한국과 일본 기업들은 기계, 자동차 부품, 석유화학 제품, 반도체와 같은 고부가가치 부품을 수출하는데, 이러한 제품은 주로 중국에서 조립하거나 가공한 뒤 다시 세계 시장으로 수출한다. 대만의 반도체 산업 역시 중국 제조업과 깊이 얽혀 있는데, 대만에서 생산된 반도체 칩은 중국으로 보내져 완성 전자제품에 탑재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통합된 생산 구조는 산업별 상호 의존성을 만들어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중국 전자제품 제조업 수요에 크게 의존한다. 또한 도요타, 혼다, 닛산, 마쓰다, 고마쓰, 히타치, 미쓰비시 등이 이끄는 일본의 자동차와 기계 산업 역시 중국 소비시장과 중국의 생산 네트워크에 크게 의존한다.
이러한 무역과 생산 관계를 종합해보면, 통합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네 국가의 경제 모두 구조적으로 중국과 연결되어 있다(대만과 한국이 가장 높고, 일본과 필리핀은 상대적으로 낮음). 이는 성장의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미국의 대중국 압박이 역내 전체로 파급되면 취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미군 기지로 만든 화환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기 위한 일관된 군사 전략을 구축했다. 이른바 ‘거부 전략’은 미국의 역대 국방전략 문서에 공식화되었으며, 특히 엘브리지 A. 콜비가 2021년에 출간한 <거부 전략: 강대국 갈등 시대의 미국 국방>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 콜비는 트럼프 1기 정부에서 국방부 전략·전력 개발 담당 부차관보로 재직하며 2018년 국방전략 수립을 주도했다. 현재 콜비는 국방부 정책 차관이며,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전략을 설계하는 핵심 전략가 가운데 한 명이다. 거부 전략의 핵심은 동아프리카에서 미국 서부 해안까지, 그리고 인도양과 태평양을 포괄하는 인도·태평양 지역이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는 인식에 있다.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중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대체하지 못하도록 막는 데 달려 있다. 이 전략은 군사적 우위와 동맹국 간 공조를 통한 억지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미국, 일본, 호주, 인도가 참여하는 쿼드(QUAD, 2017), 미국, 영국, 호주의 3자 안보 협력체인 오커스(AUKUS, 2021),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군의 예산 지원과 군사태세를 위한 틀인 태평양억지구상(Pacific Deterrence Initiative, 2021), 한미일 3국 안보협력 체제(2023)로 제도화되었다.
미국은 이란을 상대로 한 것과 같은 직접적인 군사 충돌보다, 미국 중심의 동맹 체계를 강화하고 미군기지를 전진 배치해서 중국의 방어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전략을 추진한다. 현재 미국은 차고스 제도의 디에고가르시아에서 괌에 이르기까지 약 270개의 군사시설을 운영한다. 미국 전략의 핵심에는 신뢰할 수 있는 미국의 군사력을 통해 중국의 전략적 선택을 제약하는 동시에 미국 주도의 역내 질서를 유지하고, 중국을 지역 경제의 성장 동력으로 계속 활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 구상에서 대만은 핵심적이다. 1979년 1월 1일,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 인정하고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중국 정부의 ‘하나의 중국’ 원칙도 인정했다. 그러나 1979년 4월 10일, 미국 의회는 대만관계법을 제정해 대만과 비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만에 무기를 판매해 중국을 자극하고 대만과 직접적인 경제·문화 관계를 유지하는 이중 전략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1950년 이후 미국은 대만에 약 500억 달러 규모의 방위 장비와 군사 서비스를 판매했다. 대만이 중국 본토와 통일할 경우 중국의 태평양 진출 능력이 크게 확대되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대만의 지위는 단순한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전략적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은 대만을 중국 정부를 압박하고 행동을 억제하기 위한 핵심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봉쇄 전략은 일본에서 필리핀까지 이어지는 호 모양의 섬들로 이루어진 지대로,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가로막는 장벽 역할을 하는 제1도련선에서 시작되는 지리적 포위 체계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다. 이러한 포위망은 디에고 가르시아, 스리랑카, 그리고 페르시아만 지역 미군기지까지 연결되며 더욱 깊은 ‘포위 종심’을 형성한다. 미국은 제1도련선을 따라 주요 거점과 해상 운송로를 통제하고 중국군의 기동성을 제한하기 위해 군사기지와 기지 접근 협정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 이러한 포위 전략은 일본과 한국에 있는 대규모 상설 군사기지뿐 아니라, 군사적인 복원력을 높이기 위해 태평양과 인도양 전역에 분산 배치된 보다 소규모이면서도 유연한 군사 거점도 점점 더 많이 포함한다. 이러한 기지는 감시, 정찰, 미사일 체계와 통합해 상시 감시와 신속 대응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처럼 미국 군사기지 네트워크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체계적인 봉쇄 시스템을 구성한다. 미국은 여러 국가안보 문서에서 이러한 전략을 방어적 억지로 제시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국경을 따라 미군을 배치해 긴장을 완화하기보다 오히려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미국의 봉쇄와 포위 전략은 지난 20여 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미군 군사력과 군사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구체화했으며, 특히 2020년 이후 그 속도와 강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미국은 또한 발리카탄 훈련(필리핀), 말라바르 훈련(호주, 인도, 일본), 탈리스만 세이버 훈련(호주)와 같은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에도 지원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미국은 동맹국 간 군사적 상호운용성을 강화하고, 동맹국들을 단순한 역내 협력국이 아니라 중국 봉쇄 전략의 최전선에 참여하는 군사 파트너로 전환하도록 설계되었다.
미국이 최근 제시한 대표적인 정책 프레임워크 중 하나는 2021년 국방수권법에 따라 설립한 태평양 억지 구상(PDI)이다. PDI에서는 병력 전개, 군사기지 인프라 구축, 미사일 방어체계, 그리고 일본, 한국, 필리핀 등 미국의 동맹국과의 합동군사훈련을 위한 전용 예산의 안정적 확보를 보장한다. 일본에서는 PDI를 통해 미사일 방어체계와 신속 전개 전력이 강화되었다. 한국에서는 연합군사훈련이 확대되었고, 필리핀에서는 미군기지와 감시체계가 현대화되었다. 또한 PDI는 인도태평양 전역에 장거리 정밀 타격 미사일 체계를 통합, 배치하는 기반이 된다. 여기에는 괌과 마리아나 제도의 미군기지, 그리고 2023년 미 정부가 약 6,600만 달러를 배정한 필리핀 바사 공군기지 등에 구축된 공중 및 미사일 방어 능력 확대를 포함한다. PDI는 또한 정보, 감시, 정찰 체계를 구축하고 강화해 역내 군사 활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적할 수 있도록 하고, 정밀 타격으로 알려진 군사 목표를 신속하게 식별하고 정확하게 타격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전개로 인해 일본, 한국, 필리핀과 같은 국가는 미국의 군사적 공세를 위한 전방 작전 거점으로 바뀌었다.
갈등 심기: 계급 모순과 민주주의의 한계
미국의 거부 전략은 군사적 통합만이 아니라, 제1도련선을 따라 각국, 특히 일본, 대만, 필리핀, 더 나아가 인접한 한국의 지배계급을 반중국 노선으로 정렬하는 데 달려있다. 이는 미국의 패권과 결부된 각국의 국내 산업, 군사, 정치 엘리트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일본, 한국, 필리핀, 대만 전역에서 미국 주도의 군사적 통합이 심화하면서 기존의 계급 모순은 더욱 첨예해지고, 선거 민주주의의 한계도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낳고 있지만, 이러한 정치 체제는 미국의 개입에 반대하는 세력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한 각 사회는 모두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사실상 영구화된 미군기지를 포함하여 전후 미군 주둔의 상처를 안고 있다. 이러한 경험이 이른바 ‘종속국’의 정치적 인식을 규정하고 있다.
일본
전후 일본 정치 체제는 미국 정부와 자본에 긴밀히 결부된, 우파에서 극우 성향의 정치 세력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지배했다. 일본 정치 체제는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이지만, 1955년 자민당 창당 이후 단 4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자민당이 집권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일당 지배 체제라 할 수 있다. ‘평화 조항’으로도 불리는 1947년 일본 헌법 9조는 최소한의 국방을 넘어서는 군사력 증강을 금지하고 있지만, 기시 노부스케 총리(1957~1960) 이후 일본 우익은 줄곧 이 조항의 폐지를 요구했다. 2014년, 기시의 외손자 아베 신조 총리(2012~2020) 시기에 헌법 9조를 ‘집단 자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재해석하여 일본 군비 확대를 가능하게 했고, 특히 2022년 이후 기시다 후미오, 이시바 시게루,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임기를 거치며 군비가 더욱 확대되었다. 2023년과 2024년 사이 일본 군비 지출은 21% 증가하여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1.4%에 달했다. 2026년 4월, 다카이치 내각은 평화주의 국가가 전쟁으로 이익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 따라 유지된 살상 무기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했다.
군비 지출 확대와 국가의 부를 사회적 필요에 투입해야 한다는 민주적 요구 사이의 모순은 오키나와 같이 빈곤한 지역의 미군기지 반대 운동에서 잘 드러나듯, 일본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지닌 한계를 보여준다. 일본 사회는 여전히 미국의 패권과 긴밀히 결합한 일본의 상설 지배 엘리트가 규정한 군사적 우선순위에 종속되어 있다.
오키나와 헤노코-오우라만 지역에 새로운 미 해병대 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은, 인구 밀집 지역인 기노완 한가운데 위치해 오랫동안 비판받은 후텐마 비행장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지만, 1996년 이후 끊임없이 반대에 부딪혔다. 2018년 타마키 데니는 기지 건설 반대 공약을 내걸고 오키나와현 지사로 당선되었고, 2019년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응답자 70%가 기지 건설에 반대했다. 이러한 민주적 요구와 수십 년에 걸친 법정 싸움에도 불구하고, 일본 중앙정부는 미군을 위해 매립 공사를 강행하여 오우라만의 산호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 반대 올 오키나와회의(辺野古新基地を造らせないオール沖縄会議), 오키나와평화운동센터(沖縄平和運動センター), 오키나와환경정의프로젝트(Okinawa Environmental Justice Project), 그리고 20년 넘게 매일 저항을 이어온 헤노코 연좌농성단은 지역 투쟁을 제국주의와 자결권이라는 보다 폭넓은 문제와 연결하는 정치적 실천을 보여준다.
한국
한국의 정치사는 치열한 계급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속에서 형성된 한국은, 1953년 정전협정이 평화조약으로 이어지지 않아 전쟁이 지금까지도 공식적으로 종결되지 않은 가운데, 공산주의에 맞선 미국의 군사기지이자 경제적 보루로 취급되어 왔다. 한국은 1967년부터 1988년까지 이어진 군사독재를 비롯해 친미 성향의 정부가 집권했지만, 특정 정당이 연속 집권한 적은 없기에 일본과 비교하면 정치 체제는 보다 유동적이다. 그럼에도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선출된 정부는 구조적으로 미국에 의존했다. 대표적으로 미국 및 재벌과 밀접하게 결부된 보수 성향의 윤석열 정부뿐 아니라, 제한적인 자주성을 추구했지만 수출 중심의 자본과 재벌에 결부된 문재인 정부 역시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18년 한국의 국방비는 GDP의 2.5%에 이르렀으며, 이후에도 국방예산은 이 수준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편성되었으며 2022년에는 국방비가 GDP의 2.6%까지 증가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는 2016~2017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낸 촛불혁명부터 2024년 12월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 2024~2025년 빛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 투쟁 흐름이 이어졌다. 불평등에 맞선 노동계급과 시민사회의 반복적인 투쟁, 그리고 보다 독립적인 외교정책에 대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한 종속은 변화를 가로막았다. 더 나아가 한국의 경제적, 군사적 대미 의존으로 인해 한국은 이라크 파병이나 사드 배치와 같이 대중의 강한 반발을 불러온 조치를 수용했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로 외교정책은 미국에 종속되었다. 그 결과,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실패는 남북 관계의 경색으로 이어졌다. 한편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북한의 외교적 운신의 폭은 확대되고 있다.
2025년 6월, 이재명은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저지하는 데 역할을 한 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인권, 노동 변호사 출신인 이재명 대통령 역시 한국 군산복합체를 미국과 더욱 긴밀하게 결부시키는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이 대통령은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한 경제적 양보로 한국은 미국 전쟁 기계에 더욱 깊숙이 편입되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 동맹국에 요구한 GDP의 3.5%에 해당하는 국방비 지출에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향후 10년간 미국 반도체 생산 확대와 미국 조선산업 확장을 위해 3,5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반도체는 군사용 AI 개발에도 활용될 수 있는 이중용도 기술이며, 미국 조선산업 확대는 미국 해양 산업 기반의 만성적인 병목현상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이는 한국에서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미국의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미국 조선업 부흥을 내세운, 아부성 짙은 구호로까지 표현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화그룹이 2024년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인수해 미 해군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 적체 문제를 해결할 잠재적 방안으로 거론되며, 미 해군 군함 건조에도 기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한국에는 미국 우주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골든 돔' 구상을 위해 상호운용 가능한 위성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미국과 협력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한국이 이스라엘과 함께 미국이 '모범 동맹국'이라 부르는 그룹에 포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필리핀
필리핀은 1898년 미국이 점령한 이후 주권을 행사하고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필리핀의 정치권력은 소수의 엘리트 가문이 지배했으며, 현 대통령인 봉봉 마르코스 역시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집권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들이다. 필리핀은 1991년까지 안보 계획을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했고, 1995년에는 필리핀군 현대화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이 프로그램은 주로 미국산 군사 장비 구매를 통해 필리핀 해군과 공군의 확대를 가능케 했다. 필리핀군은 군사 장비 조달과 합동훈련을 통해 미국 군사 체계와 통합되었다.
미국이 필리핀에 행사하는 권력 구조는 2014년에 처음 체결되고 2022년에 확대된 방위협력강화협정(EDCA)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EDCA는 미군이 필리핀 군사기지에 순환 방식으로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이를 통해 군사 장비의 사전 배치, 합동군사훈련, 그리고 필리핀 정부의 감독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미군 관련 인프라를 기지 내에 건설할 수 있도록 한다.
2023년, 마르코스 주니어 정부 출범 초기 EDCA에 따라 지정된 시설은 기존 5곳에서 9곳으로 거의 두 배 늘었다. 필리핀 최북단에 위치한 카밀로 오시아스 해군기지와 랄로 공항은 새롭게 지정되어 대만해협 분쟁에 대한 미국의 ‘신속 대응’을 가능하게 한다. 이 두 기지는 카가얀 계곡의 산악지대에 위치하며 군수 지원을 담당하는 후방 거점 역할을 하는 캠프 멜초르 F. 델라 크루스의 지원을 받는다. 미군이 이 기지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면서 미국은 필리핀과 대만 사이에 위치한 루손 해협 전역에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다. 네 번째로 새롭게 지정된 기지의 위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군사력을 투사하는 데 활용될 것임은 분명하다. EDCA를 통해 미군은 발리카탄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며, 마르코스 주니어 정부 들어 전례 없는 규모에 이르렀다. 2025년에는 일본도 이 훈련에 참가했다. 한편 시민사회단체와 평화운동 진영은 마르코스 주니어 정부와 미국의 긴밀한 결속이 가져올 영향을 두고 논쟁하고 있다. 이러한 친미 노선은 활동가와 농민 활동가에 대한 탄압이 심화하는 가운데 추진되었으며, 2026년 4월 필리핀 서네그로스주 토보소에서 필리핀군이 19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권 단체는 이 사건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대만
중국 혁명에서 민족주의 세력인 국민당이 패배한 이후, 장제스의 지도 아래 국민당은 대만으로 퇴각해 정부를 수립했다. 국민당은 1987년까지 38년간의 계엄 하에서 대만을 통치했고, 이후에도 2000년까지 사실상 일당 지배적 선거 체제를 유지했다. 2000년 이후에는 민주진보당이 대체로 집권하면서 대만 정치를 중국 본토와의 분리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동시에 대만을 미국 전략 구상에 보다 깊숙이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민주진보당은 기술 자본가, 분리주의 성향 엘리트, 군사 조직의 연합을 기반으로 하는 반면, 국민당은 중국과의 양안 무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기업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두 정당 모두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형성한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2022년 이후 대만의 군사비 지출과 미국의 군사 지원은 급격한 재무장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조율된 방식으로 강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대만의 국방예산은 크게 증가해 2026년에는 약 300억 달러에 이르렀다. 군사비는 2010년대 GDP의 약 2% 수준에서 2026년에는 3.3%로 상승했고, 2030년까지 5%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러한 막대한 자원의 전용은 이미 임금 정체와 생활비 상승에 직면해 있는 대만 사회에 큰 부담을 안기고 있다.
대만의 국방예산은 무기 구매에 사용되고 미국의 미국 방산업체의 이익을 증대하는 데 기여한다. 미국의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는 더욱 정례화되었으며, 미사일, 방공 무기체계, 드론을 중심으로 한 무기 판매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미국은 대만에 대한 320억 달러 이상의 무기 판매를 승인했는데, 여기에는 F-16V 전투기(80억 달러), M1A2 에이브람스 탱크(20억 달러), HIMARS 로켓시스템(4억 3,600만 달러), 하푼 연안 방어 미사일이 포함된다. 또한, 2025년에는 110억 달러가 넘는 대규모 무기 판매 계획을 새로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 개입은 이제 단순한 무기 판매에 그치지 않는다. 2024년부터는 그린베레로 널리 알려진 미 육군 특수부대가 진먼 제도와 펑후 제도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이는 40여 년 만에 대만 영토에 이루어진 최초의 지속적인 미군 주둔이다. 이러한 군사적 고조는 분명 미국이 주도하고 있으며, 군사화를 통해 자기실현적 위기의 조건을 만들어낸 뒤 중국의 대응을 ‘도발’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군사화 노선이 정치적으로 매우 취약하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2024년 5월 20일 민주진보당의 라이칭더는 40.1%를 얻어 총통에 취임했고, 국민당은 33.5%, 대만민중당은 26.5%를 득표했다. 중요한 점은 국민당과 대만민중당의 야권이 2016년 이후 처음으로 대만의 최고 입법기관인 입법원에서 다수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전체 113석 중 국민당이 52석, 대만민중당이 8석, 민주진보당이 51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2026년 4월 청리원 국민당 주석이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회담을 가지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는 지난 10년 동안 국민당 주석이 베이징을 방문한 첫 사례로, 야권 일부가 민주진보당의 군사적 긴장 고조 노선에 따르기보다 양안 관계의 대화를 재개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만 입법원은 민주진보당이 추진하는 군사적 긴장 고조 정책을 표결로 승인한 적이 없다.
국립정치대학교 선거연구센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가운데 즉각 독립을 지지하는 비율은 3.8%에 불과했으며, 이는 2002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반면 즉각 통일을 지지하는 응답자는 1.2%였다. 한편, 응답자의 83~88%는 현상 유지를 선호했으며, 그중 '현상 유지를 무기한 지속해야 한다'는 응답은 역대 최고치인 33.2%를 기록했다. 대만에서 중국의 대만 내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억제한다는 명분 아래 2019년 반침투법 제정을 계기로 더욱 강화된 민주진보당의 대중국 강경 노선은 이제 입법부와 대중 모두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대만노동당과 같은 좌파 성향의 통일주의 조직은 민주진보당 분리주의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기반이 식민지 시기 일본 제국에 협력했던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대만 문제도 중국 국공내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남긴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민주진보당이 미국의 대중국 봉쇄 전략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이나 필리핀에서처럼 대만 내 군사적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흐름에서 미국과 대만의 군사적 통합이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식 군사동맹을 체결하면 중국이 강하게 대응할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의 준동맹에 가까워지고 있다. 2022년 이후 대만에서는 군사화가 장기적으로 고착화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미국이 대만 자체의 발전을 무시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사례도 나타났다. 미국은 심지어 대만 내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대만의 반도체 공장을 파괴하는 방안까지 제안한 바 있다.
제1도련선 넘어
미국의 대중국 봉쇄 전략은 오커스와 쿼드와 같은 협력체를 통해 제1도련선을 넘어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협력체는 중층적인 군사협력 체계를 구축해 중국의 주변 해역과 인도태평양 전역에서의 군사적 활동과 기동을 제한한다. 동시에 이들은 중국과의 경제적 상호의존과 중국을 겨냥한 군사동맹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드러낸다. 이러한 모순은 이들 안보협력 체제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처럼 확대된 미국의 대중국 봉쇄 체계에서 특히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국가는 주와 인도이다.
호주
호주는 미국이 주도하는 정보 공유 네트워크인 파이브 아이즈(Five-Eyes) 회원국이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강화된 기회 파트너’(Enhanced Opportunities Partners) 6개국 중 하나이다. 따라서 호주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최근 미국과 호주 동맹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2021년 체결된 오커스(AUKUS) 협정으로, 첫 번째 축에 따라 호주는 핵추진 공격잠수함을 보유하게 된다. 이 잠수함 보유 프로그램은 미국 핵잠수함의 호주 항구 기항 확대를 시작으로, 호주 기지에 대한 순환 배치를 거쳐, 2030년대부터 호주 해군이 최소 8척의 핵추진 잠수함을 도입하는 것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이 중 일부는 2040년대에 미국과 공동으로 호주에서 건조될 것이다. 총사업비는 2,64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며, 이 핵추진 잠수함은 인도양과 태평양 전역에서 장거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다. 비록 협정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미국과의 높은 상호운용성과 작전상 깊은 의존 관계는 호주를 미국의 대중국 군사 태세에 편입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여기에는 해상로를 통제하고, 대만해협이나 남중국해에서의 미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역할도 포함된다.
호주는 이미 오커스 협정에 따라 미국에 10억 달러 이상을 지급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의 잠수함 생산 능력의 제약에 직면하면서 호주에 약속한 잠수함을 실제로 제공할 것인지 재검토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 의회 보고서에서는 중국이 호주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라는 점 때문에 호주가 미·중 간 잠재적 전쟁에서 군사 개입을 약속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잠수함 통제권을 미국이 계속 보유한 채 호주 기지를 거점으로 운용하는 방안까지 검토한 바 있다. 이는 국가의 이해관계와 동맹국으로서의 의무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과 긴장을 보여준다.
인도
봉쇄 체제에서 인도의 입장은 일본이나 대만과 다르다. 인도는 미국과 공식적인 동맹을 맺고 있지 않고,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 회원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강력한 비동맹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 인도의 외교정책은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명분 아래 미국의 전략적 선호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인도는 미국과 방위협력기본협정을 체결하여 자국 군대를 미국의 지휘, 통제, 정보 체계에 편입시켰다. 인도가 미국 쪽으로 기우는 모습은 전통 우방국인 이란과 관계가 약화된 과정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2018년 트럼프 정부가 대이란 제재를 재개하고 이란산 원유 수입 중단을 요구하자, 인도는 이에 응해 하루 약 50만 배럴에 달하던 이란산 원유 수입을 2019년 5월에는 사실상 제로 수준까지 줄였다. 이로써 인도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란산 원유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파키스탄을 거치지 않고 중앙아시아에 접근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이란 차바하르항에 대한 자국의 투자도 위태롭게 만들었다. 2025년 3월 12일 미국이 전 세계 철강과 알루미늄에 25% 관세를 부과하면서 인도산 철강과 알루미늄 관세율은 26%로 올랐다. 8월 6일 트럼프는 인도가 할인된 가격의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했다는 이유로 인도산 제품에 추가로 25%의 관세를 부과해 누적 관세율은 50%에 달했다. 결국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중단하기로 했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이 트럼프의 관세 조치를 뒤집은 이후에도 미국과 결정적인 무역협정 체결에는 이르지 않았다.
미국과 여러 협정을 맺고 있음에도, 인도는 여전히 브릭스(BRICS) 회원국으로 남아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와 중요한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25년 인도와 중국의 양자 무역은 전년 대비 12% 증가해 1,556억 달러에 달했다. 인도의 상하이협력기구(SCO) 참여도 더욱 확대되고 있다. 특히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2025년 톈진에서 열린 SCO 정상회의에 참석한 이후 이러한 흐름은 더욱 두드러졌다. 2018년 인도는 미국의 제재 위협에도 러시아로부터 S-400 방공 체계를 도입하는 54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인도와 러시아의 교역도 크게 증가했는데, 특히 할인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이 이러한 증가를 견인했다. 러시아산 원유 수입은 2022년 이전에는 사실상 미미한 수준이었으나, 2025년에는 하루 200만 배럴까지 증가하면서 러시아는 인도의 최대 원유 공급국이 되었다. 인도가 러시아와 중국과 교역을 지속하면서도 쿼드(Quad)와 미국과의 각종 협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도의 전략적 위치가 가진 핵심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인도는 미국의 단계적 강압 양상을 잘 보여준다. 전략적 협력국이라 하더라도 인도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강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다.
동맹의 취약성과 경제적 모순
미국의 거부 전략은 미국이 동맹국들을 대중국 봉쇄에 동참하도록 묶어둘 수 있다고 전제하지만, 면밀히 살펴볼수록 점점 설득력을 잃는다. 미국의 동맹국은 군사적으로는 중국과의 잠재적 충돌에 대비하는 군사 대립 구도에 있지만, 경제적 번영은 갈수록 중국과의 경제 통합에 의존한다. 이 도시에에서 살펴본 모든 지역은 동일한 근본적 모순, 즉 중국과의 경제적 통합과 중국에 맞선 군사적 정렬 사이의 모순에 직면하고 있다. 2025년 기준 이들 국가의 대중국 교역 규모는 대미 교역 규모를 크게 웃돌았다. 대중국 교역 규모는 한국이 3,310억 달러, 일본이 3,220억 달러, 필리핀은 730억 달러, 호주는 2,070억 달러인 반면, 대미 교역 규모는 한국이 2,412억 달러, 일본이 2,280억 달러, 필리핀이 270억 달러, 호주는 896억 달러에 그쳤다. 인도 역시 대중국 교역 규모가 1,560억 달러로, 대미 교역 규모인 1,490억 달러보다 더 컸다. 이러한 교역 흐름은 중국과의 전쟁이나 장기적인 대립으로 각국의 부, 고용, 그리고 정부 수입이 타격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충돌이 가시화되면 추상적인 군사동맹의 약속보다 이러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더욱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은 동맹국에 막대한 압력을 가하며 동맹의 의무를 내세웠음에도, 상당수 주요 동맹국은 전쟁 참여를 거부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한국이 전투 병력 파병은 거부했지만, 군수 지원과 전후 복구 자금은 제공했다. 보다 최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을 열기 위한 함정을 파견하라고 요구했지만, 일본과 한국을 포함해 미국의 동맹국 중 적극적으로 응한 국가는 없었다. 동맹국이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도 신뢰할 수 없는 동맹으로 드러났다면, 산업력과 핵무기를 모두 갖춘 중국과의 전쟁에는 과연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인가? 호주는 자국 도시가 보복 공격을 받을 위험과 최대 교역국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중국과의 전쟁에 전투병력을 파견할 것인가? 한국은 역내 전쟁이 북한의 개입을 촉발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참여할 것인가? 미국의 원폭 투하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지닌 일본 국민은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받아들일 것인가? 대만의 지위 문제가 인도의 안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에도 인도는 파병할 것인가? 중국의 보복을 감수하면서까지 필리핀이 참전할 것인가?
동맹은 합동군사훈련, 정보 공유, 무기 구매, 외교적 공조처럼 비용이 잠재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 때 원활하게 기능한다. 그러나 실제 전쟁이 발발해 다른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자국민의 생명을 희생하고, 경제적 파괴를 감수하며, 국가의 존립까지 위험에 빠뜨려야 하는 상황, 특히 그 국가가 공격국인 경우 동맹은 심각한 시험대에 오른다. 동맹국의 참여에 의존하는 거부 전략은 실제 충돌이 발생할 경우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특히 동맹이 진정한 공동 이해관계가 아니라 종속과 강압에 기반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전쟁 체제에 맞선 저항과 다자주의 구축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신냉전은 세계 경제 중심축의 이동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대응이다. 중국의 경제력과 기술력이 확대되면서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전략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과 동맹 체제에 더욱 의존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거부 전략은 군사화, 동맹국 간 공조, 그리고 군사력 현대화로 중국을 억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미국은 다양한 구상과 파트너십 네트워크를 통해 인도태평양 지역에 도발적인 군사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동아시아와 인도태평양 전역에서 심화하는 군사화의 영향은 매우 중대하다. 일본, 한국, 필리핀, 대만, 호주, 인도는 모두 대규모 군사 인프라가 배치되어 있거나, 군사협력 체제에 참여해 대규모 충돌의 중심에 놓일 수 있다. 역내 사회에서는 군사화 심화로 인한 기회비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방 지출에 투입되는 자원이 사회복지, 사회기반시설, 기후 회복력, 경제 발전에 대한 투자와 경쟁하게 되기 때문이다.
역내 외교 정책 전문가와 진보적 정책 입안자는 평화와 긴장 완화를 위해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대만해협과 같은 분쟁 위험 지역에서의 신뢰 구축 조치, 새로운 군비통제 구상, 그리고 남중국해의 해양 분쟁을 관리하기 위한 다자간 메커니즘 구축이 포함된다. 특히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같은 역내 기구들은 대화와 갈등 관리를 위한 잠재적 플랫폼으로 자주 언급된다.
이러한 정책 제안은 환영이지만, 진정한 변화는 결국 이 지역의 조직된 민중으로부터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역내의 다양한 사회운동은 외교, 역내 협력, 그리고 비군사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환경정의프로젝트와 노 모어 배틀 오브 오키나와(No More Battle of Okinawa)같은 단체가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바얀(Bayan)과 같은 단체가 미국과의 군사 접근 확대 협정에 반대하며, 국가 주권의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트럼프 규탄 국제민중행동과 같은 사회운동 세력과 정당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외교적 대화의 재개를 지지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논의가 미국 군사주의 속에서 대응책을 모색하는 대만, 호주, 인도 등 다른 지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창립된 국제민중총회(IPA)는 전 세계 약 200개의 사회운동, 정당,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네트워크로, 역내 풀뿌리 조직과 긴밀히 협력하며 연대를 구축하고 핵심 의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군사화가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의 평화와 발전을 위협하는 이러한 결정적 국면에서, IPA는 ‘아시아에서 손 떼라'(Hands-Off Asia)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아시아 지역에서 신냉전으로 인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구를 중심으로 한다.
모든 외국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안보를 민주화하라. 아시아 곳곳에 들어선 수백 개의 외국 군사기지는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만 역내 안보 정책이 민주화될 수 있으며, 평화가 단지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다. 각국은 경직된 군사 블록 형성을 지양하고, 전진 배치를 제한하며, 군비 경쟁 방지를 약속해야 한다. 또한 군사 정책은 시민의 민주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 군사협정, 국방예산, 외국군의 배치에 대해서는 의회와 지방정부, 시민사회가 감시해야 한다.
민중 간 교류를 확대하라. 아시아 전역의 노동조합, 학생 단체, 평화 단체, 사회운동 간 협력을 확대하여 군비 경쟁, 외국 군사기지, 그리고 고조되는 대립에 반대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또한 국경을 넘어 민중 간 교류와 문화적 연대, 그리고 풀뿌리 차원의 민간외교를 장려해야 한다. 특히 갈등상태에 있거나 긴장이 고조된 사회들 사이에서 교류를 통해 역내에서 공동의 평화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지속적인 대화를 제도화하라. 위기를 관리하고, 오판 가능성을 줄이며,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고위급 정치 대화 채널과 군 당국 간 소통 채널을 정례화해야 한다. 또한 핫라인 구축 및 우발적 충돌 방지 협정과 같은 실질적인 신뢰 구축 조치를 추진해야 한다.
협력적 안보와 공동의 과제를 우선시하라. 제로섬 경쟁에서 벗어나 기후 위기, 공중보건, 경제 안정, 발전과 같은 공동의 과제를 위한 협력으로 초점을 바꿈으로써 상호 의존을 평화의 기반으로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또한 평화를 사회 정의와 연결시켜 군사비 감축과 함께 재원을 보건의료, 기후 위기 대응, 교육, 그리고 불평등 해소를 위해 재배분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전개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의 기저에는 세계경제의 보다 광범위한 구조적 전환이 자리하고 있다. 주요 산업 강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세계 생산 네트워크를 재편하고 경제적 영향력의 분포를 변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사우스 전역에서 주권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에 새로운 동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이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다자주의로 이어질지, 아니면 경쟁의 심화로 귀결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 향방은 계급투쟁이 어느 정도 진전되어 전쟁과 긴축이 아니라 평화와 발전을 중심으로 한 의제를 확장해 나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