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주의 좌파의 위기] 차베스 이후 현 마두로 정부의 위기진단과 전망

글: 정이나(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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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현실사회주의 붕괴와 더불어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휩쓸며 안착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질서는 더 이상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체제를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불경한’것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50여 년간 치열하고 꾸준하게 극복하려했던 자본주의적 착취와 모순들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경제 정책과 제도들을 통해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사안들로 치부되었고, 이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출현을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듯 여겨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20세기 후반은 이른바 ‘좌파’들의 패배주의는 만연했으며, 적당한 체제 순응적 개혁이 최선이었으며 이미 계급적 요구와 전망은 상실되었고 조야한 문화주의에 매몰된 ‘시민운동’이 유일한 저항의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자들이 약속한 자본주의의 번영은 소수 자본가 계급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뿐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이에 대한 강렬한 사회적 저항과 정치적 반란은 뜻하지 않게 이른바 제3세계로 일컬어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권들의 등장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약 20여년이 흘러가는 지금 다시금 라틴아메리카는 수많은 이들의 주목과 염려, 그리고 안타까움을 아우르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다. 라틴아메리카 반(反)신자유주의 성향의 이른바 ‘좌파’정권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정치적 위기와 이후 가속화되는 정치 지형의 변화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파죽지세로 이어지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의 횡포를 무력화시키고, 새로운 대안적 체제 출현의 가능성을 엿보던 이른바 ‘좌파’진영의 시선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같은 급진적 시도를 처음부터 곱지 않게 바라보며 적대감과 분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저항해 온 시장예찬론자의 자유주의자들의 시선이 현재 라틴아메리카를 향해 있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 좌파정권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망에서부터 얼마 전 브라질 룰라에 이은 호세프 대통령 탄핵 소추에 이르기까지 결코 순탄하지 않은 정세는 당분가 계속 될 것이다. 이에 덧붙여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기업인 출신의 마크리 체제가 들어서면서 라틴아메리카의 ‘우경화’를 조심스럽게 진단하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실제로, 라틴아메리카 좌파정권의 위기는 경제위기와 맞물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년 이후 글로벌 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라틴아메리카와 같이 국가의 수입이 원자재 수출에 의존도가 높은 경우에는 사정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 나타나는 ‘고질적’인 경제위기는 일반적으로 이 지역의 특징이라 일컫는 ‘고질적’인 정치적 부패와 취약한 제도, 비효율적 경제 정책 등과 맞물리며 위기의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분위기이다. 마치 라틴아메리카의 저개발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같은 논리로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또 다시 ‘자원의 저주’로 시작해서 ‘자원의 저주’로 끝나고 있는 듯 연이어 국내에 소개되는 자극적인 소재의 뉴스와 소식들은 가히 압권이다. 연일 위기 상황의 ‘정점’을 찍고 있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는 외신과 뉴스가 국내에 소개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현재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정치적 위기상황을 대변하는 가장 자극적인 사례는 베네수엘라이다. 적어도 차베스 집권 이후 천명한 “21세기 사회주의”의 노선을 결코 고운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없었던 해외 주요 외신들은 마치 반격의 기회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고, 외신을 비롯한 국내의 기사들(외신에 기대어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보도하는)은 짐짓 센세이션 그 자체이다. 이를 바탕으로 베네수엘라 위기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을 (그들의 언어를 통해 재구성 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베네수엘라는 포플리즘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렇다 할 경제정책이나 비전 없이 대중의 ‘동원’을 목적으로 하는 환심성 사회정책의 무분별한 남발과 이를 가능하게 한 석유수입이 확보된 고유가 시기와의 운 좋은 만남 정도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이는 현재 마두로 체제로 이어지는 차베스 시기의 베네수엘라를 가장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방식중의 하나이다.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그러나, 어느 사회의 위기가 그러하듯 위기의 원인은 현상이 아닌 구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20세기 여느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베네수엘라 또한 절대적 빈곤층과 심각한 사회 양극화를 겪고 있었고, 이 같은 모순적인 사회구조의 심화는 석유가 발견되는 1920년대 이후였으며, 지난 80여 년간 고스란히 축적되어온 사회적 결과였다. 베네수엘라 사회는 석유가 발견되는 1920년대부터 베네수엘라 사회는 이를 독점한 이른바 소수과두엘리트 계급이 지배하는 계급사회였다. 석유수입을 독점한 이 계급은 베네수엘라 인구 85% 이상을 극빈층으로 내몰고 나서야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 변화의 계기를 만든 것도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결과로 삶이 더욱 피폐해진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1989년 카라카소를 겪으면서 약 10년 후 완벽한 계급역관계를 형성한 결과였다.

20세기를 관통하는 시기 석유산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배계급의 카르텔은 다수 국민의 삶을 최하 빈곤층으로 몰아넣었으며, 이에 대한 결과가 1999년 차베스 집권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상식적으로도 80여 년간 향유한 기득권을 빼앗긴 과거 베네수엘라 사회의 지배계급들의 저항은 당연한 것으로 봐줄만 하다. 지금까지 독점 향유해온 그들의 기득권을 가만히 앉아서 순순히 내줄리 없지 않은가. 따라서 현재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국제적으로 심각한 위기상태에 있는 자본주의 경제위기와 맞물리면서 내적으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과거 지배계급들의 공세로 인한 결과이다. 베네수엘라 사회에 대한 경제적 사보타지나 국제 미디어들의 반응만을 살펴보더라도 이 같은 현상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현재 베네수엘라 위기의 본질은 전형적인 계급투쟁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차베스 집권 후 베네수엘라 정부가 지난 16여 년간 끊임없이 시도한 사회개혁은 정작 실패할 수밖에 없는 ‘포퓰리즘’이었던 것일까?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이러한 위기 상황을 단순히 국민의 환심을 사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선심성 복지 정책의 무분별한 확대, 그리고 흥청망청 무계획적으로 탕진한 국가재정이 바닥이 드러나자 발생한 (이미 예견된) 위기로 치부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전형적인 현상중심의 단편적인 해석일 뿐이다.

한 매체는 얼마 전 치른 총선에서 현재 여당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대선에 대한 결과는 그 동안 포풀리즘 일색으로 정책을 일관해 온 베네수엘라 정부에 대한 ‘민심의 보복’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차베스 집권 이후 항상 다수를 차지했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난해 치러진 총선의 결과(여소야대의 형성)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집중시킬 만 했다. 이 같은 결과는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더욱 단순 명료하게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수치로 사용되었다. 즉, “무분별한 포퓰리즘 정책의 대가”를 베네수엘라는 선거에서도 치른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

베네수엘라는 1950년대 말부터 지속된 푼토피호 체제를 통해 정치권력을 균등하게 나누어 갖는 ‘합법적’인 제도를 마련한 국가였다. 이에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라는 거침없는 찬사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반면 이 시기 베네수엘라의 사회는 극심한 빈곤과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으로 국민 대다수의 삶은 피폐해졌다. 지난 40여 년간 풍부한 석유를 독점한 소수의 과두 엘리트 계급은 전체 인구의 85%가 넘는 인구를 빈민층으로 전락시키고 나서야, 그리고 1999년 선거에서 패하고 서야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상당수의 많은 정치학자들은 베네수엘라의 푼토피호 체제를 보수와 개혁세력의 공존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 제도였으며, 차베스의 준-권위주의적 통치가 이 같은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Javier Corrales 2013)[1]. 여기서도 전형적인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이 등장한다. 마치 정치가 경제에 자유롭고 그 역도 가능하다는 순진한 ‘자유주의’자들의 시각이다. 푼토피호 체제가 보장한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제도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80%가 넘는 베네수엘라 민중의 배제가 선결 조건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베네수엘라 사회의 개별적인 특수성과 역사성을 간과한 이 같은 해석이야말로 제도 그 자체가 숭배되는 역설을 가져온다.

베네수엘라의 계급투쟁

차베스가 훼손했다고 주장하는 민주주의 민낯은 바로 여기에 있다. 1999년 집권한 차베스 정부는 등장부터가 결코 순탄하지 않더니, 급기야 2002년 두 번의 쿠데타 시도를 포함하여 줄기차게 베네수엘라 사회 내에서도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야 했다. 그때마다 차베스의 지지자들은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더욱 정치적인 조직으로 성장한 반면, 동시에 이들은 과거 기득권층이었던 소수 엘리트 계급과는 적대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과거 국가권력을 독점한 채 그들이 점유한 국가의 ‘부’를 분배하려는 집단과 그것을 거부하는 집단과의 갈등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2002년 쿠데타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 현실이었다.

차베스 이전 높은 수준의 문맹률과 카라카스 외각 빈민촌의 수많은 아동들이 학교의 존재를 모르고 자라고 있었다는 엽기적인 사실, 그리고 이 같은 기회의 불평등이 재생산해내는 유일한 것은 가난과 범죄의 악순환이라는 사실은 웬만한 사회학자라면 이견이 없을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포플리즘’정책은 바로 여기가 시작점이다. 베네수엘라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이 1920년대이다. 이후 20세기까지 줄곧 베네수엘라 경제는 석유에 의존하였고, 이미 뒤틀려버리고 모순이 축적된 사회구조는 정치권력을 독점한 소수의 갑부를 제외한 대다수가 빈곤으로 몰리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1999년 차베스의 등장은 개인 영웅주의의 부활도 아니고 위로부터 영도되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파격적인 계급 역관계의 실현을 이루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정치와 경제력을 독점한 소수 과두엘리트 계급과 차베스를 선택한 전체 유권자의 약 60%를 차지했던(2000년 대선 당시) 380만 국민과의 관계가 그것이다. 이에 그 동안 소외계층이었던 베네수엘라 빈민가에는 주민 자체조직인 수많은 주민평의회와 꼬무나스가 만들어졌으며, 수천 개의 사회단체와 대중자치조직들이 만들어졌다. 이는 더 이상 즉흥적인 개인이나 소외받던 계층이 그들의 권리를 산발적으로 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과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힘을 조직했다는 의미이고,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녕 베네수엘라의 현재 위기를 이 같이 단순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포플리즘 정책이 야기한 총체적 위기’로만 환원시켜도 무방한 것일까? 적어도 베네수엘라의 위기를 이른바 ‘포플리즘’이라 불리는 복지정책을 확대한 결과라는 단편적인 설명으로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분석이고 이해 방식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 동안 철저하게 배제당하고 소외받던 계층에게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흙탕물이 나오는 상수도 시설을 교체하는가 하면 쓰러져가는 빈민가의 주거시설을 확충하며, 저렴한 가격으로 주요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 과연 선심성 복지정책이고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 무분별한 지출이라는 질타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보통 이럴 때는 선 성장 후 분배라는, 즉 낙수효과를 기대해야 한다는 경제전문가의 진단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같은 ‘순진한’ 발상은 현재 선진국의 경제 불황 극복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는 통화정책이 더 이상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시장이 아닌 공공투자를 확대하는 국가의 재정지출을 ‘독려’하는 IMF 보고서가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베네수엘라의 위기를 신자유주의 경제기조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흉학한’ 포플리즘의 대가 정도로 단순히 치부해 버리는 것은 너무 편협하지 않은가.

또한 베네수엘라 민심의 보복이라는 총선 ‘참패’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지난 2010년 총선과 비교해서 여당은 약 20만 표를 잃은 반면, 야당 지지자는 약 200만이 늘었다. 결국 여당을 지지하는 민심의 변화이기 보다 야당을 지지하는 민심이 크게 늘어났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베네수엘라의 순탄하지 않은 경제상황이 현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증폭시켰고, 그에 대한 선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력한 응집력을 갖고 여당을 지지하는 민심, 자신들의 계급적 요구를 지속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여당을 선택한 치열하게 정치적인 그들은 베네수엘라의 포플리즘을 비판하는 이들에겐 그저 정부의 혹세무민하는 퍼주는 정책에 동조하는 ‘어리석은’ 국민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어쩌면 치열한 계급투쟁의 연장선에서 서로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사회변화의 역동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야만 양쪽 모두에게 공평한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차베스의 갑작스런 사망은 그 동안 베네수엘라 사회 내에서 그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형성되었던 정치적 구심점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일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는 차베스의 등장과 시작되었으니, 당연히 그의 부재는 모든 영역에서의 다양한 변화를 수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혼란과 위기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차베스 체제의 국가 운영 방식이 급진적이었다는 사실에 비례해서 이 같은 혼란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차베스 이후 마두로 체제가 직면한 위기는 지금까지 베네수엘라 사회를 관통하며 끊임없이 제기된 정치적 대립의 연장선이며, 체제 이행기(체제성격의 변화는 아닐지라도)의 과도기적인 혼란을 틈탄 정치적 반대 세력의 공세와 자본가 계급의 경제적 사보타지의 심화로 악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차베스 체제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마두로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으로 더욱 급진적인 쿠트 웨이랜드(2013)방식의 ‘행동주의’가 필요한 대목일지도 모른다.

쿠트 웨이랜드(2013)는 라틴아메리카 좌파정부들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복잡한 현실에 순응하는 현실주의적 온건좌파로 브라질과 칠레, 그리고 혁명적 전통에 기초한 상징과 슬로건을 이용하고, 정치적 야망으로 현재 상황에서 다소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는 급진적 좌파 정부로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를 그 사례로 들고 있다. 이어 그는 적어도 현실 순응적 좌파가 더욱 안정적이고 장기적 차원에서 더 나은 ‘경제적’성과들을 그려내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좌파 진영의 도발적인 행동주의신중한 현실주의 사이의 조야한 분류법으로 라틴아메리카 4개국의 정치경제를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효율적 정책의 우월함과 현실에 기초한 체제 순응적 전략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같은 논쟁은 이미 격동의 혁명의 시기에 논쟁이 된 수정주의를 연상케 한다. 이에 대한 결론은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체제 순응적 전략의 우월함을 강조한 수정주의의 민낯을 굳이 열거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백년도 넘은 제2인터네셔널 수정주의 논쟁에 세삼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민주주의를 크게 훼손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차베스 체제를 물려받은 마두로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만약 지금 베네수엘라를 대변하는 마두로 체제가 천명하듯 베네수엘라는 여전히 볼리바리안 혁명의 수순을 밟고 있다면 적어도 “혁명의 시기에 위기는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지지로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혁명은 그 직접적이고 희비극적인 성과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결속된 강력한 반혁명을 산출함으로써, 그 전진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맑스의 혁명이론, 프랑스의 계급투쟁).

** 본 원고는 필자가 KIEP(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EMERiCs(신흥지역정보 종합지식포탈)에 2016년 7월에 기고한 내용을 바탕으로 수정 편집하여 재구성한 것임.

  1. Kurt Weyland, et. al(2013), 라틴아메리카 좌파정부 - 성공과 실패의 정치경제학-, 이담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