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대통령 묘 방문기: 차베스는 죽지 않았다

글: 송대한(The 숲 영문본 편집국장, ISC)번역: 심태은(The 숲 한글본 편집국장, ISC)

산들바람이 불고 햇살이 따사로운 날. 나는 카리브해의 날씨에 흠뻑 빠져들었다. 오늘은 베네수엘라 방문 마지막 날이자 일정 중 처음으로 회의장을 벗어나 다른 곳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대외협력부처 소속) 내 담당관의 소형차에 올라 쿠아르텔 드 라 몬타나스(산의 병영, 베네수엘라 군 박물관)에 위치한 차베스 묘로 향했다. 차로 이동 중에도 사람들이 거리를 걷거나, 줄을 서 있거나, 길가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과 민중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어떠한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를 묘사한 벽화를 주의 깊게 보았다.

쿠아르텔 드 라 몬타나스는 카라카스의 산악지대인 에네로 23(1월 23일) 구역에 있다. 내 담당관은 “이 곳은 ‘대중적인’ 곳”이라고 했다. 하층 계급이 많이 거주할 뿐 아니라 가장 저항 정신이 투철하고 호전적인 차비스타(차베스주의자)가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구역의 이름은 베네수엘라에 형식적 민주주의를 가져온 1958년 봉기에서 비롯되었다. 그 이름이 상징하는 저항 정신에 걸맞게, 이 구역의 민중들은 1989년에 정부가 IMF 조치를 이행하는 것에 반대하여 다시금 투쟁에 나섰고, 이 투쟁은 카라카소라고도 알려진 더 큰 민중봉기의 일환이었다. 3년 후, 이 투쟁에서 영감을 받은 젊은 우고 차베스 육군 대령이 동일한 지역에서 실패하고 만 쿠데타를 일으켰으리라. 항복 당시, 차베스는 TV 생중계를 통해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이것이 베네수엘라 민중의 마음 속에 깊은 울림을 주었을 터이다. 차베스의 묘는 이 쿠데타가 일어난 2월 4일을 상징하는 4층에 있다.

시내를 가로지르다 보면 차베스, 크리올(중남미 태생 스페인인) 독립운동 장군,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운 원주민 및 아프리카계 지도자의 이름을 기리는 벽화와 구역 이름들을 볼 수 있다.

호세 레오나르도 치리노(Jose Leonardo Chirino)는 노예 해방과 독립을 위해 투쟁한 자유로운(노예가 아닌) 잠보(아프리카인 및 원주민)였다. 4층이 2월 4일 쿠데타를 상징하는 것과 같이, 파라카디스타(낙하산병)는 우고 차베스를 지칭하는 것이다.

독립 후 보수세력에 대항해 진보세력이 일으킨 내전에서 농민을 이끌었던 에제키엘 자모라(Ezequiel Zamora)의 초상화 위에 “토지와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한국에서 온 나는 베네수엘라가 역사를 바로잡은 것이 존경스럽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한국에서는 독립운동가나 독립투사가 아니라 친일파가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이어진 미국의 개입과 점령, 그리고 한국 전쟁은 부역자를 처벌하고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

쿠아르텔에 가까워지자 차베스의 모습이 보인다.

차베스 묘는 차베스 뿐만 아니라 그가 가졌던 베네수엘라에 대한 비전도 기리고 있다. 마침 운 좋게 볼리바리안 대학교 1의 학생을 상대로 한 가이드 투어에 같이 참여할 수 있었다.

차베스 묘의 외부에는 정치, 경제적으로 통합된 라틴아메리카 국가 건설을 위한 차베스의 지치지 않는 노력을 상징하는 CELAC (중남미·카리브 해 국가 공동체)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2월 4일에 차베스가 남긴 명언. 중년의 아프리카계 원주민 여성이자 민병대의 일원인 가이드는 차베스의 말을 인용해 차베스와 같이 책임을 지는 것과 차베스의 사람들과 같은 충실성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차베스가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이 곳에는 사람들이 일요일에 차베스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작은 예배당이 있다. 우리 가이드는 성모 마리아 상 중 단순하고 투박한 모양의 상을 가리키며 이것은 실제 차베스가 거리에서 한 여성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차베스의 민중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전시실에는 우고 차베스의 명언이 담긴 베네수엘라의 다양한 지역의 모습이 전시된 벽이 있었다. 다른 쪽에는 아프리카계, 원주민, 여성, 남성, 아동, 농민, 노동자 등 다양한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사진이 있었다. 더 가면 휠체어를 탄 여성과 정신 장애를 가진 남성의 사진이 있는데, 우리 가이드는 “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모든 면에서) 다소 느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는 베네수엘라가 가진 다양성의 일부”라고 말했다.

차베스 묘는 우고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혁명과 통합된 라틴아메리카라는 비전을 형성하는 데 영감을 주었던 것들도 기념하고 있다. 볼리바리안 대학 학생들은 가이드가 자신이 우고 차베스와 그가 가진 비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들었다. 사망 후에도 차베스는 가능한 다른 세계로의 길을 가리키며 새로운 세대의 차비스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차비스타가 말하듯, “차베스는 죽지 않았다! 차베스는 수 백만 명이 되었다! 내가 바로 차베스다!”

가운데 인물은 시몬 볼리바르이다. 볼리바리안 혁명이라는 이름은 위대한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베네수엘라의 공식 국가명칭인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공화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통합된 라틴아메리카, 즉 위대한 볼리바리안 국가를 위한 더 큰 비전을 승인했음을 나타낸다.

가이드 투어 도중, 수비대의 교대식이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교대식 시작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가이드가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아나요?” 하고 물었다. 나와 함께 있던 볼리바리안 대학 학생들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쉽게 맞혔지만, 가운데에 있는 살바도르 아옌데는 주저하며 대답했다.

차세대 차비스타와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이대를 보니 이 친구들은 혁명 과정이 전개되는 동안 성장했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인솔 교수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듯, 모두 이 구역 출신이었다.

Notes:

  1. 차베스 집권 직후, 내생적 개발(베네수엘라 국민을 포함, 베네수엘라의 자원에 투자하는 것을 통한 개발) 및 무상교육 공약 실현의 일환으로 볼리바리안 대학이 설립되었다.